1998년 7월7일 미국에서 열린 제53회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은 1998년 7월7일 제53회 US여자오픈에서 맨발 투혼을 보인 골프선수 박세리 모습. /사진=유튜브 채널 'LPGA Korea' 캡처
1998년 7월7일(현지시각) 미국 위스콘신주 블랙울프런 골프장에서 열린 제53회 US여자오픈에서 20세의 박세리는 태국계 미국인 아마추어 제니 추아시리폰과 연장 접전 끝에 극적인 우승을 거뒀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US오픈 우승이었다.

월요일 이른 아침부터 갤러리들이 운집한 가운데 박세리와 추아시리폰은 팽팽한 선두 경쟁을 벌였다. 박세리는 LPGA 데뷔 첫해였고 추아시리폰은 듀크대에 재학 중인 아마추어였다. 두 선수는 연장 18홀을 포함해 장장 92홀을 소화하며 메이저 대회 사상 최장 승부를 펼쳤다.
하얀 맨발이 만들어낸 기적… 연못 속 '인생 샷'
당시 연장 1차전 마지막 18번 홀에 두 사람은 동시에 올라왔다. 박세리가 먼저 드라이버를 잡고 쳤으나 공은 왼쪽 개울가 언덕 밑으로 떨어졌다. 공이 물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정상적으로 걷어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관중과 상대 모두 벌타를 먹고 드롭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세리는 페어웨이를 서너번 오가더니 돌연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그는 양말까지 벗고 구릿빛 피부와 대조되는 하얀 맨발로 연못 속에 걸어 들어갔다. 종아리까지 물에 잠긴 박세리는 아이언샷을 극적으로 성공시키며 파를 지켰다. 이겼다고 생각했던 추아시리폰은 파 퍼트를 놓쳤고 이어진 연장 2차전에서 박세리의 결정타가 나오며 우승이 확정됐다. 이를 지켜보던 팬들과 국민들은 박세리와 함께 벅찬 눈물을 쏟았다.

박세리와 추아시리폰의 연장 혈투는 골프사에 남을 전무후무한 기록이 됐다. US오픈은 물론 메이저대회 최장 연장 승부였다. 박세리 역시 "그때가 제 인생 샷이었다"며 "그 순간 손의 감각이 최고였다. 선수 생활하면서 우승을 많이 했지만 그때 샷감이 역대 최고였다"고 회상했다.
1998년 7월7일 미국에서 열린 제53회 US여자오픈에서 박세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은 1998년 대회에 참가한 박세리 선수 모습. /사진=유튜브 채널 'LPGA Korea' 캡처
스포츠 성과 넘어서 '국가적 상징'으로… 한국 여자 골프 부흥 이끈 박세리
1998년은 IMF 외환위기로 국민이 고통받던 시기다. 박세리의 우승은 단순한 스포츠 성과를 넘어 국민에게 큰 위로와 자부심을 안겼다. 언론은 "박세리 신드롬"이라며 1면으로 보도했고 그의 맨발 샷은 TV 애국가 영상 배경에도 등장했다.

해외 반응도 뜨거웠다. 미국 골프 전문 매체 골프다이제스트는 박세리의 맨발 투혼을 '여자 골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4위'로 선정하며 "경제위기를 겪던 한국에 희망을 줬고 전 세계 선수들에게 영감을 안겼다"고 평가했다.


박세리는 US여자오픈을 시작으로 같은 해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2001년 '브리티시여자 오픈', 2002년 'LPGA 챔피언십'에 우승하면서 최연소 메이저 4승의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2007년 7월 우리나라 골프 선수 최초로 LPGA 명예의 전당에 들었다. 2016년 은퇴 이후에는 '세리 키즈' 세대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활약하며 한국 여자 골프의 전반적 역량 강화에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