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바이오(Bio), 양자(Quantum) 분야 집중투자 필요성 / 사진=강지호 기자
#. 2001년 3월, 싱가포르 1위 통신사 싱텔이 호주 통신사 옵투스의 인수를 결정했다. 인수 금액은 172억 호주달러(당시 약 19조원). 인수 검토부터 완료까지 걸린 기간은 단 7개월에 불과했다. 싱텔의 지분 51%를 보유한 최대주주 '테마섹 홀딩스'가 투자 결정에 전혀 개입하지 않아 가능했던 일이다.
테마섹 관계자는 20일 "싱텔이 통신사(옵투스)를 인수하려 했을 때 테마섹과 상의하지 않았고, 싱가포르항공이 수십억 달러 상당의 항공기를 구매했을 때도 그 소식을 신문에서 접했다고 테마섹 전 회장은 말했다"며 "싱가포르의 대통령이나 총리 등 정부는 테마섹의 투자나 기타 사업, 기업 결정에 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테마섹은 싱가포르 재무부가 100% 지분을 보유한 글로벌 투자지주회사다. GIC(싱가포르투자청)처럼 국부펀드로 분류되지만, 해외 투자에 집중하는 GIC와 달리 국내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74년 6월 정부 기금으로 3억5400만 싱가포르달러(당시 약 700억원, 1억4500만 달러)를 조성하며 시작됐다. 이후 순가치는 지난해 3월 기준 4340억 싱가포르달러(당시 약 450조원, 3250억달러)까지 불어났다. 초기 자본금 대비 643배 성장한 셈이다. 연평균 수익률 14%를 기록 중이다.

테마섹의 투자 대상 가운데 41%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기업들이다. 이들 기업의 연결 매출액은 총 1500억 싱가포르달러(약 170조원)이고, 싱가포르에서만 약 16만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테마섹의 핵심 투자 분야는 △디지털화 △지속가능한 삶 △소비의 미래 △장수 시대 등 4가지다.


디지털화를 주도하는 AI(인공지능), 데이터, 사이버보안 등 분야에 집중 투자한 결과 테마섹은 현재 엔비디아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 데이터브릭스 등 빅테크의 주식을 상당부분 보유하고 있다. 지속가능한 삶 차원에선 재생에너지와 저탄소 솔루션 기업 등에 주목했다. 열 펌프 기반 청정에너지, 암모니아 전력 솔루션, 분산 태양광 개발 등 기술력이 우수한 '딥테크 스타트업'에 투자가 집중됐다.

소비의 미래 분야의 경우 전자상거래, 디지털 결제와 관련해 텐센트, 메이트완 등 중국 테크기업은 물론 자국 내 물류·소비 플랫폼인 메이플트리 등에도 집중 투자했다. 장수 시대에 맞춰 헬스케어와 바이오 분야도 주된 투자 대상으로 삼고 있다. 한국의 셀트리온 뿐 아니라 인도네시아 병원 체인 등 전 세계 혁신기업을 찾아 지분을 확보했다. 자국 내 혁신 의료 서비스, 병원 네트워크 스타트업에도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며 산업 육성에 힘을 보태고 있다.

성공한 싱가포르, 실패한 말레이시아

재정경제부는 올 상반기 초기 자본금 20조 원 규모의 '한국형 국부펀드'의 마스터플랜(재원·투자 범위·지배구조·운영체계)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또 정부는 금융위원회를 중심으로 올해부터 5년간 30조원씩, 총 150조원 규모의 '국민성장펀드'도 출범한다.

두 국가주도펀드 모두 테마섹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선 2가지를 벤치마크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첫째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거버넌스(조직체계) 구축, 둘째 나눠주기 방식이 아닌 국가 미래산업 육성 등을 위한 집중투자다.

투자의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해 국부펀드가 제 역할을 못한 대표적인 사례가 싱가포르의 이웃국가인 말레이시아다. 말레이시아는 2008년 테렝가누투자청(TIA)을 통해 33억달러(당시 약 3조6500억원), 2009년 '하나의 말레이시아를 위한 국가 개발 투자회사'(1MDB)에서 11억2500만달러(당시 약 1조3000억원)를 조성했다.

국가 전략산업 투자와 글로벌 자본 유치 등을 목표했지만 나지브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는 국부펀드 관련 인사권과 투자 권한 등을 독점했다. 첫 해외 투자 건부터 자금을 무리하게 투자했고, 결국 나지브 전 총리가 국부펀드를 사적으로 유용했다는 등의 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이후 펀드는 2016년 재정 파산 직전까지 갔고 현재까지 잔여 부채를 상환 중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만약 국민성장펀드와 한국형 국부펀드가 정치권 낙하산과 관료들의 회전문 인사 수단이 된다면 싱가포르가 아닌 말레이시아의 길을 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테마섹 홀딩스가 투자한 기업 41%가 싱가포르에 본사를 두고 있다. 테마섹은 싱가포르 재무부가 100% 지분을 보유한 글로벌 투자지주회사다. 테마섹은 자바어 또는 말레이어로 싱가포르를 가리키는 고대 명칭이다. '바닷가 마을' 또는 '호수 주변 마을'을 뜻한다. / 사진=테마섹(Temasek)

파급력 큰 AI·바이오·양자에 집중투자해야
국민성장펀드의 목적은 첨단 전략산업 육성이다. 5년간 △직접투자 15조원(기금 7.5조원 + 민간 7.5조원) △간접투자 35조원(기금 7.5조원 + 민간 27.5조원) △인프라투융자 50조원(기금 10조원 + 민간 40조원) △초저리대출 50조원(기금 50조원) 등 150조원이 투입된다.
투자 대상은 △반도체 △이차전지 △디스플레이 △바이오·백신 △수소·연료전지 △항공우주·방산 △모빌리티 △원전 △미디어·콘텐츠 △로봇 등 여러 분야를 아우른다.

그러나 국민성장펀드가 실질적 성과를 거두려면 여러 분야에 골고루 나눠주는 방식보단 파급력이 큰 일부 산업에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AI, 바이오, 양자 분야가 최우선 투자 대상이 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유회준 KAIST 인공지능반도체대학원장은 "n분의 1로 예산을 나눈다면 단기적으로 연구자들이 만족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나라에 남는 게 없다"고 말했다. 유 원장은 "AI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지향하고 나머지는 계속 추격해야 한다"며 "AI 반도체는 국가 기술력의 상징이자 미래 국방력과 산업에 기반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 원장은 한국 반도체 기술이 여전히 경쟁국은 넘어설 수 없는 '초격차'를 유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AI 시대에도 반도체가 기반 기술이라며 지속적인 투자를 강조했다. 바이오, 양자 분야 역시 반도체를 활용하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AI 분야의 경우 데이터센터 건설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로 지목된다. 현재 국내 AI 이용 수요 증가 추세에 비춰보면 전력소비량 기준으로 최소한 1기가와트(GW) 규모의 AI데이터센터가 추가로 필요할 전망이다.

일각에선 현재 AI 시장을 구글 등 미국의 빅테크와 중국 기업 등이 주도하고 있는데 굳이 국내에 데이터센터를 구축에해야 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자율주행 자동차나 로봇 등 데이터 송수신 시간이 결정적인 분야는 국내 데이터센터가 필수적이다. 국가 핵심 데이터가 해외 서버에 저장될 경우 이른바 'AI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또 AI데이터센터는 공급 부족 탓에 연간 최대 10% 이상의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수익률은 전통 인프라 자산을 웃돈다. 도로와 항만 등 민자사업의 기대 수익률이 연 4~5% 수준인 반면 데이터센터의 자본환원율(순영업소득/자산가치)은 6~7%대에 형성돼 있다. 여기에 전력 공급 확약과 인허가 신속 처리 등 정책 지원이 더해질 경우 내부수익률(IRR)이 2~3%포인트 상승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 경우 연 8~10% 수준의 수익률도 기대할 수 있다.

시장에선 전남 해남 솔라시도에 건설될 AI데이터센터와 해상풍력 배후 단지가 국민성장펀드의 투자 대상 중 하나가 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재 해남군은 66만㎡ 부지에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있고 화원 산단에 20만㎡의 해상풍력 배후 단지를 만들고 있다. 국민성장펀드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해상풍력과 AI 데이터센터 연계 투자가 아이디어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해 6월24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퀀텀코리아 2025'에서 관람객들이 양자컴퓨터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 사진=뉴스1
한국 뿐 아니라 선진국의 고령화로 수요가 확대되는 바이오 분야에 대한 집중투자 필요성도 제기된다. 특성상 장기간의 연구개발(R&D)과 전임상·임상시험 기간을 거쳐야 하는 바이오 분야는 민간 자본만으론 초반 데스밸리(창업 위기기간)를 버티기 어려운 만큼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KAIST 등에서 배출되는 의과학자들이 창업을 선택할 수 있도록 초기 스타트업 지원 펀드 등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양자 분야는 경제 뿐 아니라 안보 차원에서도 투자가 절실한 분야다. 양자 분야에 대한 투자를 늘리지 않으면 국내 대·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기술탈취 가능성 뿐 아니라 군사기밀 유출 가능성도 높아진다.

양자컴퓨터는 0과 1만 활용하는 디지털 컴퓨터와 달리 양자 역학 원리에 따라 0과 1을 중첩해 나타낼 수 있다. 따라서 연산속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진다. 구글이 슈퍼컴퓨터로 1만년 걸릴 계산을 양자컴퓨터로 200초 만에 풀었다고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양자컴퓨터는 신약 개발 등 분야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한다.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이 양자컴퓨터 분야에선 다소 뒤처져 있지만 양자암호통신과 양자센서는 비교 우위에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이 강점을 지닌 반도체 등 제조업을 접목하면 미국 등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력이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한상욱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양자기술활용연구거점 사업단장은 "앞으로는 양자의 활용과 산업화 쪽으로 투자의 무게를 옮겨야 한다"며 "한국은 ICT(정보통신기술) 강국인 만큼 전자계측 장비, 알고리즘, 반도체 공정 기반 QPU(양자처리장치) 제조 등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