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은 캔버스나 하드보드지에 밑바탕을 칠하고 밑그림을 그렸다. 전날 사용하다 남은 물감을 모두 섞어 바탕을 칠했다. 그 위에 밝고 어두운 색을 번갈아 칠하면서 요철감이 있는 재질을 만들었다. 물감이 마르면 요철을 나이프로 긁어낸 뒤 그 위에 다시 물감을 바르고 붓으로 정리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표면이 완성되면 검은색으로 윤곽선을 그렸다. 마무리 단계에서 대상을 표현하고 색을 입혔고 부드러운 천으로 이를 문지르고 붓질로 요철을 다듬었다.
박수근의 '빨래터'
박수근이 주로 그린 그림은 어린아이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우물가 길가에 앉아있는 어머니, 빨래터에서 빨래하는 어머니가 주된 대상이었다. 아기업은 소녀, 나무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 등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다.
얼굴은 표현하지 않았다. 표정도 없고 눈코입을 그려도 단순하게 그렸다. 특정인을 그린 게 아니라 시대를 대표하는 어머니를 표현했다.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 노동의 숭고함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토록 했다. 사물을 단순하게 표현했지만 데생작업부터 철저한 완성도를 추구했다. 수차례 데생을 지우고 덧칠한 흔적이 남아있다. 단순하게 표현한 나무도 수많은 습작을 거쳐 완성했다.
박수근의 삶은 고달팠다.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이었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갑자기 곤궁해졌다. 어렸을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 화가의 꿈을 키웠지만 집안 형편 탓에 독학을 해야 했다.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를 출품해 첫 입선을 하고 많은 작품을 입선과 특선에 올렸다.
21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후 홀로 춘천에서 최악의 빈곤한 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 금성중학교에서 미술교사로 부임했지만 6.25전쟁 이후 가족과 헤어진 뒤 군산에서 부두노동생활을 한다. 미군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돈을 모아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외국인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한국적인 소재와 정감, 특이한 기법으로 인기를 끌었다.
49세의 나이에 백내장이 발병, 왼쪽 눈 수술을 받았지만 시신경이 끊어졌다. 이후론 오른쪽 눈만으로 작품을 그렸다. 과거 국전 낙선에 실망해 음주를 많이 했고 간경화와 응혈증이 악화돼 1965년 5월 새벽 작고했다.
박수근은 그림을 그릴 물감을 구하지 못해 많은 작품을 팔아야 했다. 유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주한 미군 등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외국인 소장자가 많은 이유다.
박수근의 작품이 워낙 유명해지면서 위작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7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팔린 박수근의 빨래터가 위작논란 대상이었다. 당시 박수근의 빨래터는 45억2000만원에 팔렸다.
경매를 맡긴 이는 미국인 존 릭스였다. 1954년부터 2년간 한국에서 중장비 회사 총책임자로 있던 시절 박수근으로부터 작품을 받았다고 했다.
박수근의 다른 작품에 비해 선명한 색감이 위작이란 주장의 근거였다. 존 릭스는 '자신이 사 준 물감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작품색이 밝은 편'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2009년 '빨래터 그림은 진품으로 추정된다'고 판결했지만 여전히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박수근의 작품은 역대 경매가 중 톱 10에 4개의 작품을 올려놓고 있다.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팔려 역대 한국 경매 시장 사상 최고가 미술품 기록을 갖고 있다. 이외에 시장의 사람들이 2007년 3월 케이옥션에서 25억원에 팔렸고 '농악'과 '공기놀이하는 아이들'은 각각 20억원에 팔렸다.
박수근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블루칩으로 통한다. 서울옥션에 따르면 박수근의 작품은 1998년부터 2007년까지 10년간 작품값이 5.5배 올랐다.
박수근이 최근 언론에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안타깝게도 부실 저축은행 스캔들에 연루됐다. 얼마전 퇴출된 미래저축은행은 지난해 9월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하는 과정에서 하나금융그룹 산하 하나캐피탈에 5점의 그림을 담보로 제공했다. 유상증자 규모는 145억원이었다.
담보로 제공된 그림 가운데 모자와 두 여인, 노상의 여인들, 노상의 사람들 등 3점의 박수근 작품이 들어있다. 이외에 김환기의 '무제'와 미국 화가 톰 블리의 볼세나 등도 담보로 제공됐다. 이들 그림의 담보가액으로 192억원이 책정됐다.
미래저축은행은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 영업정지됐고 하나금융그룹은 담보로 잡은 그림을 경매로 매각하고 있다.
지난 3월 서울옥션에 위탁해 진행한 경매에서 박수근의 노상의 여인들은 5억원의 감정가에 경매를 시작, 6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모자와 두 여인은 4억4000만원에 경매를 시작, 5억원에 낙찰이 이뤄졌다.
하나금융은 나머지 작품들도 경매를 통해 매각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침체된 미술 시장이 살아나지 않는 한 140억원에 달하는 담보대금을 회수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부실저축은행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미술품이 단골로 회자된다. 미래저축은행에 앞서 지난해 상반기 퇴출된 부산저축은행도 대주주가 91점의 미술품을 갖고 있었다. 이 작품들은 예보콜렉션이라 명명돼 서울과 홍콩에서 경매에 부쳐졌다.
위작논란이 된 박수근의 빨래터를 두고 미술 애호가들은 '진위 여부를 떠나 보기 싫다'고 평한다. 스캔들에 연루된 작품들도 미술품 애호가들 사이에선 꺼리는 대상이다.
박수근은 이런 대접을 받을 작가가 아니다. 국민화가의 명성에 걸 맞는 대접이 필요하다. 2년 뒤면 박수근 탄생 100주년이 된다. '부정'의 대상으로 미술품이 거론되지 않는 원년이 되길 바라본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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