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이자할부가 안된다고요?"
2월20일 서울 마포구의 한 대형할인점 가전매장. 소형가전 구입을 고려하던 한 고객이 신용카드 무이자할부가 중단됐다는 얘기에 구입을 망설였다. 계산대에서는 무이자할부 대상 카드인지를 확인하는 문의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2월18일부터 백화점·대형할인점 등 매출액 연간 1000억원 이상의 대형가맹점에서 무이자할부가 전격 중단됐다. 지난해 12월 발효된 여신전문금융업법(이하 여전법) 개정안에 따라 그동안 카드사가 모두 부담해오던 무이자할부 행사비용을 대형가맹점과 나눠서 부담해야 하는데, 카드업계와 대형가맹점들이 이견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카드사들은 올 1월부터 무이자할부 행사를 중단했다가 고객들의 거센 항의를 받자 대부분 설 연휴가 포함된 주말인 2월17일까지 유예기간을 둔 바 있다. 다만 KB국민카드와 BC카드는 2월28일까지, 씨티카드는 3월31일까지 무이자할부서비스를 이어간다.
◆ 무이자할부 중단사태, 왜?
카드업계에 따르면 2011년 한해 동안 신용판매 이용금액 312조원 가운데 할부금액은 20% 수준인 68조원에 달한다. 전체 카드 결제 중 무이자할부가 차지하는 비중도 80%에 육박한다. 따라서 무이자할부서비스가 중단되면 대형가맹점의 매출에도 상당한 여파가 미칠 전망이다.
실제로 2월18일부터 무이자할부서비스를 중단한 이후 대형마트와 백화점의 매출이 급감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카드사의 무이자할부서비스가 중단된 지난 18일부터 이틀간 이마트의 가전 매출은 지난해 같은 때보다 14%나 줄었다. 디지털가전은 19.8% 줄었고, 전자레인지나 청소기 등 소형가전도 8.9% 감소했다.
한 유통업체 관계자는 "무이자할부서비스가 중단되면서 구매금액이 큰 상품 구입을 주저하는 고객이 늘어 앞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이 나타날 것 같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한 카드업계 관계자는 "(무이자할부 수수료 분담에 대해) 그동안 대형할인점들은 카드사가 진행하는 행사인데 왜 가맹점에서 수수료를 내야 하냐는 입장이었다"면서 "하지만 카드 무이자할부 행사가 이들 가맹점의 매출에 기여해온 부분이 상당하다는 사실이 입증됐으므로 분담을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와 카드업계에 따르면 2011년 카드사들이 무이자할부를 지원하기 위해 쓴 비용은 약 1조2000억원으로, 전체 마케팅 비용(5조1000억원)의 24%를 차지한다. 앞으로는 이 비용을 카드사와 대형가맹점이 반반씩 부담해야 하는데, 가맹점들의 반발이 거센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대형가맹점과 카드업계의 협상 난항으로 소비자들이 불편을 겪는다는 볼멘소리가 많아서다.
그러나 카드사들은 무이자할부 중단에 따른 초기 혼란은 불가피하지만, 카드 이용객이 겪는 불편함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카드사들이 일시적으로 무이자할부 적용행사를 벌이고 있고, 상당수 고객이 무이자할부 기능을 탑재한 카드를 소지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카드업계에 따르면 신한카드·KB국민카드·삼성카드·현대카드·롯데카드·BC카드 등 카드사들이 발급한 무이자할부 탑재카드는 5300여만장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현재 사용되는 카드(휴면카드 제외)가 총 8900여만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전체 카드의 60% 이상이 무이자할부서비스가 적용되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대형가맹점에서의 무이자할부서비스가 당연시 돼 소비자들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상당수 고객들이 이미 무이자할부 기능이 탑재된 카드를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면초가' 카드사에 바라는 건 공익사업(?)
무이자할부 중단 외에도 카드사들은 신용카드 수수료 논란 이후 도처에서 악재에 허덕이고 있다.
우선 금융당국발(發) 규제가 카드사들을 옭아매고 있다. 금융당국은 최근 무이자할부서비스 기능을 담은 신용카드의 신규 발급에 제동을 걸었다. 수익자부담을 원칙으로, 지나치게 많은 부가서비스가 카드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시각이다.
4월부터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의 할부결제도 중단된다. 현금서비스 할부결제는 카드로 현금을 빌리고 최장 6개월에 걸쳐 나눠 갚는 것으로, '카드 돌려막기'가 가계부채의 주원인으로 지목된 탓이다. KB국민·삼성·롯데카드는 4월부터 현금서비스 할부결제를 중단키로 했다.
금융당국이 신용카드 해지 때 고객에게 연회비를 환불하도록 표준약관을 고친 점도 수익 감소에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기존에는 신용카드 발급 후 이용실적이 없는 휴면카드이거나 해지 시 고객이 민원을 넣을 경우에 한해 연회비를 환불해줬다.
무엇보다 카드업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비난이 카드사의 피로감을 키우고 있다. 카드업계가 고객들이 카드를 쓸수록 손해가 발생하는 '공익사업(?)화' 구조로 변모하고 있음에도, 경제논리에 입각한 합리적인 기준이 아닌 다분히 감정적인 비난에 직면해있다는 하소연이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사업자가 가격을 정하는 의사결정 구조에서 배제되고, 국가가 가격을 법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 같다"며 "최근 카드 논란의 숨은 주범은 (영세가맹점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표를 의식한 국회일 수 있다"고 꼬집었다.
카드업계는 올해 수익성이 본격적으로 악화될 것으로 예측한다. 이번 여전법 개정에 따라 카드사는 전체 240만개 가맹점 중 94%인 중소가맹점의 수수료를 하향 조정했다. 카드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 4분기부터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되며 적자가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 카드사 CEO들의 '정론·직언'
"젖소목장이 있는데 우유판매(가맹점 수수료)는 적자라서 정작 소(카드론 등 대출사업) 사고파는 일이 주업이 되었다. 그런데 소 장사로 돈을 버니 우유 값을 더 낮추란다." (현대카드 정태영 사장)
"카드업 종사자에겐 올 겨울 추위만큼이나 혹독한 비즈환경을 이겨내야 할 각오가 필요하고, 카드 소비자들은 첨밀의 달콤함을 추억의 곳간에 묻어야만 할 지도 모를 일이다. " (최기의 KB국민카드 사장)
"이제 카드수수료가 공공요금이 된다는 얘기인데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 표와 미래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내가 너무 순진한가?" (이강태 하나SK카드 전 사장)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6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