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지나가면 어깨를 부딪힐 만큼 좁은 골목. 서울 종각부터 시작해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종로에는 유난히 많은 뒷골목과 다닥다닥 붙은 허름한 상가들이 형성돼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뒷골목을 '피맛골'이라 불렀다. 이곳을 돌아다니다 멈춰 서서 상가 안을 들여다보면 허름한 건물 속, 어두운 조명이 테이블을 비추고 있다.

조선시대 때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진 이곳은 시대의 아픔과 격동, 그리고 급격한 산업화 속에서도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며 안식처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다. 정이 있고 추억이 있는 서민들의 장소였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곳도 흐르는 세월 앞에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나 보다.


피맛골이 시작되는 광화문 교보빌딩 뒤편. 이곳은 그 어느 피맛골 보다 더한 어둠이 깔리고 있다. 1990년대부터 재개발이 결정되고 하나둘 불이 꺼지면서 이제 피맛골에는 듬성듬성 불빛이 새어 나올 뿐이다.


◆ 들어서는 웅장한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는 피맛골

세종로 사거리에서 동대문 방향 좌측 대로변에는 요즘 웅장한 규모의 드높은 대형빌딩들이 세워지고 있다. 지난 2007년 20층 규모의 르메이에르빌딩이 들어섰고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이 일대에는 최근 준공된 '그랑서울'(2개동)을 비롯해 'D타워'(2개동), '청진8지구오피스빌딩' 등 23~24층 규모의 대형빌딩 5채가 들어설 예정이다. 대부분 이미 완공돼 마무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이 일대에는 13개의 대형오피스빌딩이 들어서 총 19개의 대형오피스빌딩들이 세워졌거나 들어설 예정이다. 이 빌딩들 중앙에는 '중앙공원'이 들어설 계획이지만 아직 공사를 진행하지 않아 그나마 피맛골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도 내년부터는 없어진다.

사실 그동안 피맛골의 재개발을 둘러싼 반대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피맛골과 같은 역사적인 랜드마크를 보존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재개발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저렴한 가격과 편한 분위기는 큰 장점이었지만 비위생적인 환경과 불결한 화장실, 음식 재활용의 관행은 큰 불만이었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미 피맛골의 재개발은 시작됐고 완성 초읽기에 들어갔다. 이제 공은 서울시와 건물을 올린 시행사, 그리고 시공사들에게로 넘어갔다. 어떻게 하면 과거 피맛골처럼 하나의 문화이자 휴식공간으로 연출해 서민들에게 다가설 수 있을지가 숙제로 남았다.

이를 의식한 듯 건설사들은 수익을 목표로 하는 일반상가건물(근린생활시설)처럼 네모반듯한 '성냥갑'으로 짓지 않았다. 저마다 개성 있고 뛰어난 디자인으로 서민들에게 그리고 상가에 입주할 임차인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더욱이 국내 유수 건설사들이 이곳에 모여 비슷한 시기에 건물을 올리다 보니 보이지 않는 자존심 대결도 펼쳐진다.

이미 오래전에 세워진 르메이에르빌딩은 시간이 지나다 보니 바로 옆에 세워진 그랑 서울에 비해 디자인이나 건축기법이 부족하긴 하지만, 가장 먼저 대로변에 들어섰다는 상징성과 함께 서린낙지, 청진옥, 미진 등 유명 피맛골 맛집을 품고 있다.

이외에도 지난해 1월 종로구청 바로 옆에 들어선 두산위브파빌리온빌딩도 목포집, 장뚜가리, 의전방 등 피맛골의 대표 맛집이 들어서 피맛골의 명맥을 잇고 있다.


오래된 피맛골 맛집 아닌 '뉴 피맛골' 만든다

하지만 최근 GS건설이 시공한 그랑서울은 기존 '피맛골 맛집'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먹거리 문화를 탄생시켰다. 현실이 만화로, 다시 만화를 현실로 옮긴 것이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 <식객>을 바탕으로 오픈한 '식객촌' 얘기다. 그랑서울 1층에 오픈했다.

식객촌은 만화 <식객>과 연관된 맛집 중 9곳을 옛 피맛골 거리 한 자락에 모아놓은, 말 그대로 맛집 '촌'(村)이다. 입점된 식당은 ▲수하동 ▲han6gam by 참누렁소 ▲오두산메밀가 ▲만족오향족발 ▲부산포어묵 ▲무명식당 ▲전주밥차 ▲벽제한우설렁탕청미 ▲봉우리한정식 등이다.

이들 식객촌 식구들은 2~3주에 한번씩 식객촌 번영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는 '골목길의 미관을 위해 입간판은 전부 철거하자', '계절별로 주력 메뉴가 다르니 업체별로 돌아가며 해당 달의 쿠폰을 붙인 달력을 만들자', '식객촌의 날을 만들어 소외계층에게 무료 식사나 도시락을 제공하자'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온다.

식객촌이 이런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게 된 데는 새로운 경영모델도 한몫했다. 식객촌 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이들 매출은 모두 객촌으로 모인다. 회사는 이 매출에서 식당의 입지조건에 따라 평균 20%의 수수료를 떼고 나머지 금액을 각 매장에 돌려준다. 대신 회사는 이 돈으로 임대료와 관리비·마케팅비 등을 충당한다.

식객촌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은 벌써부터 뜨겁다. 하나의 식문화 콘텐츠가 새로운 피맛골에 들어온 것이다. 이 때문에 앞으로 그랑 서울과 같은 라인에 들어서는 다른 빌딩들은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이들 빌딩은 새로운 식문화 콘텐츠로 타 빌딩보다 앞서가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 유수 컨설팅업체를 선정하고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며 식객촌을 능가하는 상가촌을 만들기 위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 새로 들어서게 되는 빌딩의 컨설팅을 맡은 업체 관계자는 "벌써 수십번 기획안을 작성해 시행사 측에 보고했지만 시행사 측에서는 보완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입점업체 선정도 치열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음식점은 물론 특성있고 도심과 피맛골에 어울리는 업체를 찾기 위한 노력이 실로 대단하다. 컨설팅업체 관계자는 "지금까지 몇백개의 업체들과 미팅을 잡고 과연 이 업체가 우리 빌딩에 어울리고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를 평가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설명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4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