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과 ‘을’(乙)은 계약서를 쓸 때 계약 당사자를 단순하게 순서대로 지칭하는 법률용어다. 예컨대 해외서적을 번역해 출판할 때 작성하는 계약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위 저작물의 저작권자 및 양도인 OOO(이하 ‘갑’이라 한다)과 출판권자 및 양수인 OOO(이하 ‘을’이라 한다)은 위 저작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저작재산권 양도, 양수 계약을 체결하고 신의와 성실로써 준수한다.”

이어지는 부분에는 갑과 을이 각각 어떤 권리와 의무를 갖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이처럼 갑과 을은 계약서 내용상 나오는 순서대로 붙인 후 계약서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을 편하게 표기하는 방법일 뿐이다.


계약을 맺는 양측을 갑과 을로 표기할 때 돈을 주거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 쪽을 반드시 갑으로 표기하는 것도 아니다. 앞서 예로 든 계약서에는 을이 발주자로서 돈을 주는 입장이고 갑이 제작품에 해당하는 원고를 넘겨주고 돈을 받는 입장이다.

이처럼 불공정한 계약, 노예 계약이 아닌 서로 이해관계가 맞고 서로의 필요상 대등한 입장에서 계약을 맺을 때 편의상 사용하는 용어인 갑과 을이 요즘은 강자와 약자를 뜻하는 용어로 바뀌어 회자되고 있다.


 


◆‘갑을’, 대등한 개념


‘갑을’의 어원은 음양오행이다. 오행(五行)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형성하는 나무, 불, 흙, 쇠(금속), 물에 해당하는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 다섯가지 활동적 원소를 말한다.
오행 각각은 음양이조(陰陽二組)를 이뤄 10개의 조합을 만들어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의 십간(十干)이 된다. 십간에는 하늘이 변하는 이치가 담겨 있어 10천간(天干)이라고도 한다.

땅이 변하는 이치를 나타낸 지지(地支)는 12가지 동물을 나타내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12지지로 이뤄진다. 십간(十干)은 5색과 5행, 방향, 절기 등을 나타내며 이 중에서 갑(甲)과 을(乙)은 둘 다 똑같은 목(木)에 속하고 나무를 상징하는 푸른색(청색)을 나타내며 방위상 똑같이 동방에 속한다. 요즘 사회적인 통념상 갑과 을이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과 달리 오행상 갑과 을은 똑같은 입장인 것이다.

오행의 변화는 우주에 존재하는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한다. 생성의 관계에서는 나무에 의해 불이 되고(木生火),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나면 재가 돼 다시 흙이 되고(火生土), 흙으로부터 쇠가 형성돼 나오고(土生金), 쇠는 또 물을 생성하며(金生水), 물은 나무를 살아가게 한다(水生木).

생성시키거나 도와주는 것이 있으면 반대로 소멸시키거나 극(剋)하는 것도 있다. 나무는 흙을 괴롭혀야만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木剋土), 흙은 제방이나 댐 등을 통해 물길을 막거나 물의 방향을 조정하는 힘을 갖는다(土剋水). 물은 거대한 불길도 끌 수 있고(水剋火), 불은 뜨겁게 타오르면 용광로 안에서 무쇠도 녹일 수 있으며(火剋金), 금속인 도끼는 나무를 거침없이 밸 수 있다(金剋木). 극이란 지배하거나 통제한다는 뜻과 통한다.

갑과 을은 둘 다 똑같은 목에 속하므로 상생의 관계도 아니고 상극의 관계도 아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것도 아니고 한쪽이 잘 되기 위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억누르면서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다.

갑을은 둘 다 똑같은 나무일 뿐이다. 숲 속에는 수많은 나무가 조화를 이루며 산다. 대등한 개념인 갑을이 언젠가부터 주종의 관계, 상하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변했다.

상극의 관계는 ‘목극토’이므로 ‘갑을’(甲乙)이 아닌 ‘갑무’(甲戊)로 표현해야 한다. 계약서에 갑과 을로 표기하는 것도 종속의 관계, 지배의 관계,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동반의 관계로 나타내는 것이다.

10간을 음양으로 구분하면 갑·병·무·경·임은 양, 을·정·기·신·계는 음에 해당한다. 한 몸인 갑과 을의 다른 점이라면 갑은 양이고 을은 음이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등이 함께 조화를 이루듯 양과 음은 한몸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관계다.

모든 물질의 기본단위인 원자에는 양전하를 갖는 양성자와 음전하를 갖는 전자가 똑같은 개수로 존재한다. 양성자 개수와 전자 개수가 똑같지 않으면 불안한 상태가 돼 그대로 계속 남기 힘들다. 즉 갑과 을은 함께 모여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가 된다고 볼 수 있으며 어느 한쪽이 우세한 상태로는 안정된 사회가 존속하기 힘들다고 해석된다.

하지만 ‘갑’은 상대적으로 우월적 지위나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변하고 ‘을’을 약자로 간주하면서 갑이 을에게 정신·육체적 위해를 가하거나 물질적 피해를 줘 불공정한 행위를 하고 있다.

왜곡된 갑질 행태는 사회 구석구석 파고들어 병적 증상으로 퍼졌다. 감기 한두번 걸리지 않은 사람 없듯 갑질 한두번 안해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두고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 요한복음 8장의 말씀처럼 갑질하다 언론에 보도된 사람에 대해 “너희 중 갑질한 적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한다면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안진걸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이 지난해 12월 ‘땅콩 회항’으로 물의를 빚은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을 항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고발했다. /사진=뉴스1 오대일 기자

◆집·직장 등 만연한 갑을관계

갑의 횡포에 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비난하는 것에만 그치지 말고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살펴 ‘반면교사’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배울 점이 있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아! 저러면 안 되는구나” 생각하며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 무심코 비슷한 언행을 한적은 없는지 되돌아 볼 수 있다. 또한 그 사람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분석하다 보면 그런 상황을 연출하지 않으려면 어떤 부분을 조심해야 할지 알 수 있다.

‘땅콩리턴’ 사태처럼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사례는 직장에서 드물지 않다. 한국 최고수준의 인지도와 연봉을 자랑하는 모 회사에서 임원으로 재직 중인 지인으로부터 임원회의 때 경영자가 욕설하고 서류를 내동댕이쳤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갑질은 상사와 부하, 고용자와 피고용자, 대기업과 납품업체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자식에게 갑질하는 부모도 있고 부모에게 갑질하는 자식도 있다.

부모는 연로해 능력이 떨어진 반면 자식은 성공했을 때 자식이 부모에게 갑질하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자식이 청소년인 경우 공부 잘하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을 이용해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땐 자식이 공부를 못하더라도 먼저 인간이 되도록 부모가 가르칠 필요가 있다.

남편이 아내에게 갑질하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갑질하는 가정도 있다. 이 경우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면 이혼할 것이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친구(남친)에게 미모를 무기로 갑질하는 경우도 있다. 데이트하기로 한 날 남친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1시간 동안 기다리게 만드는 여자의 이야기를 TV에서 본적이 있다. 아무리 예뻐도 늘 그렇게 한다면 보통의 경우 헤어지겠지만 그럼에도 쫓아다니는 남자도 있다. 갑질하는 여친에게 기꺼이 ‘슈퍼 을’이 되겠다는 것이다.

여자는 그 남자가 아니더라도 자기와 사귀고 싶어 하는 남자가 많기에 콧대를 최대한 높이는 것이다. 여친으로 하여금 자신의 신용카드를 마음껏 쓰게 했다가 신용불량자 된 남자를 직접 본 적도 있다.

직장에서도 갑을관계는 존재한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상대로 갑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반대로 부하직원이 상급직원에게 업무능력을 무기로 갑질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가 직접 본 사례인데 A라는 직원은 유능하지만 성격에 문제가 있었다. A는 상사가 자신을 쉽게 자를 수 없다는 약점을 이용해 상사에게 함부로 대들고 심지어 상사의 집무실 안에서 상사에게 삿대질하는 믿기 힘든 행동을 버젓이 했다.

매장 안에서 함께 근무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직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점장의 하소연이 방송을 타기도 했다. 그 직원이 물건을 워낙 잘 팔기 때문에 내보내지 못해 괴롭다는 얘기였다.

◆변하는 사회, 영원한 갑은 없어

을이지만 갑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지 않는 확실한 길은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나를 필요로 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한 노력은 하지도 않은 채 불평만 늘어놓는 이들이 많다. 다만 노력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추기 힘든 만큼 갑을 관계에 대한 사회적 고민이 대두되고 법과 제도적 접근이 필요하다.

갑질 당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적 해결이 가능하다면 그래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 그럴 때는 감수하면서 인내하거나 무언가를 포기하는 길을 택한다. 그 무엇은 종종 돈과 관련된 것이다.

갑질하는 고용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피고용자는 사표를 내고 싶지만 당장 먹고 살 걱정이 남는다. 학대하는 남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하고 싶은데 자식과 살아갈 경제력이 뒷받침 안되는 경우도 있다. 유능하지만 못된 언행을 일삼는 직원을 내보내려면 그 직원이 올리는 업무성과를 포기해야 한다.

하청업체나 납품업체도 마찬가지다. 다른 발주자를 통해 먹고 살 수 있느냐에 따라 약자인 을의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결정된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갑을관계가 고정불변의 관계가 아니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빠르게 변하는 사회 구조상 영원히 갑으로 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SNS가 발달하면서 관행적으로 묵인됐던 갑의 횡포에 제동이 걸리고 있음에 주목하자.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8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