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경상북도 대구에 작은 섬유업체가 문을 열었다. ‘비로도’라 불리던 비단, 벨벳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100% 수입에만 의존하던 시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벨벳 생산이 지방 한 업체의 도전에서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그 도전은 ‘맨땅에 헤딩’이나 다름없었다. 제대로 된 기계설비는 물론 기술력도 갖추지 못했다. 숱한 실패를 반복한 끝에 어렵사리 벨벳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 그로부터 55년 뒤. 이 회사는 제직부터 염색, 가공에 이르는 벨벳 생산 전과정을 담당하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국내보다 세계시장에서 더 유명하다. 지난 2001년 벨벳부문 세계시장점유율 1위로 올라선 데 이어 2004년엔 수출 1000만달러, 2005년엔 2000만달러를 돌파했다. 세계를 호령하는 대표적 한국기업 중 하나로 전체 매출액 중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80%를 넘어섰다.
‘한물간’ 섬유시장에서 벨벳 하나로 세계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주인공은 영도벨벳이다. 이 회사는 지난 2001년부터 15년간 세계 벨벳시장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사진제공=영도벨벳
◆‘벨벳’으로 세계 주무르다
세계무대에서 일궈낸 성과도 남다르다. 애플의 태플릿 PC ‘아이패드’에 영도벨벳의 LCD 러핑포를 납품하는 데 성공했고 이탈리아의 패션브랜드 조르지오 아르마니, 미국의 앤클라인, 스페인의 자라 등 세계적인 브랜드들도 영도벨벳 제품을 쓰고 있다.
특히 두바이 등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고급 벨벳시장의 95% 이상을 영도벨벳이 장악했다. 영도벨벳의 이불과 옷감은 이 지역 신부들이 지참해야 하는 혼수 필수품으로 꼽힐 정도다. 우아한 색상과 부드러운 감촉, 뛰어난 내구성 등이 영도벨벳만의 경쟁력이라는 평가다.
그 성장의 중심엔 류병선 회장이 있다. 류 회장은 지난 1960년 남편인 고 이원화 회장과 함께 영도벨벳을 창업했다. 처음엔 국제고무의 털신에 사용되는 털을 짜기 위한 직기 4대를 빌려 방한화용 털실을 제작하다 벨벳직물 사업으로 전향했다. 어렵게 자체 벨벳 생산에 성공한 영도벨벳은 국내 최초로 아세테이트벨벳, 면벨벳, 초극세사폴리벨벳 등을 잇따라 개발하며 급성장했다.
류병선 회장. /사진제공=영도벨벳
1974년엔 중동지역에 처음으로 벨벳을 수출했다. 반응은 기대 이상. 영도벨벳의 독자브랜드인 ‘쓰리이글’은 세계 벨벳시장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점점 영도벨벳 제품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고 1995년 영도벨벳은 구미공단으로 이전하면서 사세를 확장했다. 최신형 직기 150대를 갖추고 제품 개발과 대량 일괄생산에 들어갔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2년 뒤 불어닥친 IMF 외환위기 사태는 잘 나가던 영도벨벳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렸다. 800원대에 불과하던 원·달러 환율이 2000원대까지 치솟았고 달러로 직기를 구입하면서 발생한 1000억원대 부채는 순식간에 3000억원대로 불어났다. 판매율이 급감하면서 부채상환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영도벨벳은 워크아웃 절차를 밟아야 했다.
류 회장이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 남편은 회장, 류 회장은 사장 타이틀을 달고 위기돌파에 나섰다. 부부는 개인 땅과 아파트까지 처분하고 회사를 살리기 위한 극약처방에 돌입, ‘품질’을 우선으로 하는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직원들과 결의를 다졌다.
각고의 노력 끝에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폴리벨벳이 세계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때마침 마이크로벨벳이 개발되면서 3년 만에 워크아웃을 조기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사진제공=영도벨벳
◆ 신시장 개척…제2의 도약
남편 타계 이후 전적으로 회사 경영을 이어받은 류 회장은 가장 먼저 벨벳 사용영역을 다각화하는 데 힘썼다. 기존 의류에 머물던 벨벳을 소파커버, 침대커버, 요와 이불 재료, 가구, 벽지, 자동차, 선박 등의 시장으로 확대했다.
특히 벨벳벽지는 영도벨벳의 신성장동력이 되고 있다. 벨벳 특유의 보온성과 단열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빛의 움직임에 따라 다양한 표면 질감을 연출할 수 있어 고급 인테리어시장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에 힘입어 매출도 함께 증가한다는 게 회사 측 관계자의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는 “영도가 세계무대에서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벨벳을 옷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하도록 응용분야를 넓혔기 때문”이라며 “2003년 이후 매년 20~30%에 달하는 수출신장률을 기록한 것도 이런 차별화전략 덕분”이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류 회장은 벨벳의 대중화에도 힘쓴다. 류 회장의 대구 자택 옆에 위치한 ‘영도다움’은 지난 2012년 1월 개원한 세계 최초의 벨벳전문 복합문화공간이다. 벨벳체험관과 세미나관, 벨벳숍, 카페, 벨벳전시관, 영도갤러리 등으로 꾸며져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도벨벳 관계자는 “벨벳의 모든 것을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대구의 대표적인 문화공간”이라며 “섬유의 고장 대구의 본질을 잘 전달하면서 대표적인 대구 추천여행지로도 꼽혀 방문객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라고 전했다.
지난 50여년간 이어온 벨벳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 류 회장은 오늘도 열심히 벨벳을 짜낸다. 올해는 그간 성과를 바탕으로 벨벳 단일품목의 ‘1억달러 수출’을 목표로 삼았다. 지방의 작은 업체에서 세계 1위 타이틀을 거머쥔 영도벨벳. 몇년 후엔 또 어떤 모습으로 세계 벨벳시장을 휘감을지 그 무궁무진한 미래에 섬유업계의 이목이 집중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1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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