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9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애플과 프랑스 명품업체 에르메스의 만남이 공개됐다. 애플이 신제품 웨어러블 디바이스인 애플워치2와 함께 ‘에르메스 애플워치 에디션’을 선보인 것. 애플워치의 기술력이 에르메스 가죽 장인이 수공으로 만든 가죽 스트랩과 결합해 고급 스마트워치가 탄생했다. IT업계와 패션업계 정상의 만남은 IT제품의 디자인 업그레이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지금까지 애플워치를 포함한 웨어러블 디바이스에 대한 실효성 의문이 꾸준히 제기돼왔다. 소비자가 기존 생활패턴을 바꾸는 수고를 감수하고 고가의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구입할 만큼 큰 가치를 느낄지 의문이라는 것. 웨어러블 디바이스는 신발이나 옷처럼 신체적 단점을 보완하거나 필수로 착용해야 하는 제품이 아니다. 또 패션 액세서리처럼 개성을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
특히 스마트워치는 기존의 시계를 대체하거나 시계를 차지 않는 사람이 필요성을 느끼도록 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지녔다. 소비자의 니즈를 불러 일으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왼쪽 손목에는 사회적 위치를 과시할 명품시계가, 오른쪽 손목에는 개성을 뽐낼 액세서리가 자리 잡은 상황에서 스마트워치는 방황하고 있다.
하지만 스마트워치가 소비자의 새로운 니즈를 찾아 헤매지 않고 기존 욕구를 더 크게 채워준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스마트워치가 시장에서 새로운 하이테크제품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했을 때 애플은 에르메스와 결합, 애플워치를 프리미엄시계로 포지셔닝했다. 애플워치의 최신 기능을 포장해줄 디자인으로 에르메스보다 최선의 선택은 없었을 것이다.
◆애플의 스텔스 포지셔닝 전략
마케팅에서 쓰이는 ‘스텔스 포지셔닝’(stealth positioning)처럼 애플워치의 본질적 IT기능을 에르메스 디자인으로 숨긴 것이다. 여기서 스텔스 포지셔닝은 소비자가 거부하는 제품군일 때 그 본질을 숨겨 비밀스럽게 소비자가 선호하는 제품으로 이동시키는 전략이다. 애플워치는 명품디자인 시계로 포지셔닝함으로써 지나치게 혁신적이어서 소비자가 거부하는 제품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애플은 이 기세를 몰아 이달 초 애플워치의 새로운 에르메스밴드 4종을 발표했다. 프랑스 명품브랜드로서의 이미지를 적극 차용하듯 에르메스밴드는 푀(Feu), 블뢰 파옹(Bleu Paon), 블뢰 사피르(Bleu Saphir), 블랑(Blanc)의 불어로 된 4가지 색상을 내놨다. 기존 색상인 포브(Fauve), 느와르(Noir), 카푸신(Capucine), 에땅(Etain)도 별도로 판매할 예정이어서 디자인에 대한 세심한 전략이 엿보인다.
애플과 에르메스의 만남처럼 고사양의 IT제품이 미적 감각을 더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트렌드가 이어지고 있다. IT업계에서 명품디자인 콜라보레이션의 대표적 사례로 LG전자의 프라다폰을 빼놓을 수 없다. LG는 이탈리아 명품브랜드 프라다와 총 6년간 협업을 통해 3개의 시리즈 제품을 선보였다. 프라다폰은 제품 개발단계부터 협력으로 진행돼 외관디자인은 물론 내부 사용자환경(UI) 설계까지 일관성 있게 이뤄졌다. 특히 중고제품이 품귀현상을 빚는 등 연이은 히트를 기록했다.
대부분 스마트폰 기능이 상향 평준화되면서 기능적 차이보다 디자인의 차이를 경쟁력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늘었다. 스마트폰시장에서 한방이 필요했던 LG전자는 스마트폰 G시리즈를 통해 기존 메탈커버의 스마트폰에서 벗어나 가죽커버를 채택했다. 최고급 풀 그레인 가죽을 사용하고 실도 명품가죽에만 사용되는 독일 귀터만(Gutermann)사의 마라 라인을 사용해 패션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성숙기에 접어든 스마트폰시장에서 차별화를 꾀하는 방편으로 IT제품과 패션브랜드 간 콜라보레이션은 필수관문이 됐다. 삼성전자가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제휴해 ‘아르마니폰’을 선보인 바 있고 팬택은 명품 라이터제조사 듀퐁과 손잡고 ‘듀퐁폰’ 등을 출시하기도 했다.
IT제품과 패션브랜드의 만남은 단순히 디자인 강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웨어러블기기의 똑똑한 진화로 기능적인 콜라보레이션이 일어나기도 한다. 삼성전자는 스마트워치 기어S를 위해 스포츠브랜드 나이키와 손잡고 공동개발한 ‘나이키 플러스 러닝’을 탑재했다. 기어S는 스마트폰과 연동되지 않더라도 나이키 신발과 연결돼 소비자의 운동정보를 기록하고 심박수 등을 자동으로 측정한다.
◆패션과 만난 웨어러블기기
인텔은 미래지향적 패션브랜드 크로맷과 ‘뉴욕 패션위크 2016 S/S콜렉션’에서 웨어러블기능이 들어간 의상을 선보였다. 또 디자인브랜드 ‘오프닝 세레모니’와 함께 스마트팔찌인 MICA(My Intelligent Communication Accessory)를 내놨다. 뱀가죽을 활용해 럭셔리하게 디자인돼 패션아이템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외에도 인텔은 파슬그룹(Fossil Group), 오클리(Oakely), 룩소티카그룹(Luxottica Group), 태그호이어(TAG Heuer),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FDA) 등 패션업계와 협력을 진행 중이다.
캐나다 IT업체 OM시그널은 랄프로렌과 함께 메이저 테니스대회 US오픈에서 폴로 테크셔츠를 공개했다. 티셔츠를 입고 있으면 센서가 자동으로 신체변화를 측정해 클라우드로 전송하는데 모바일에서 그 분석결과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셔츠는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폴로 패션스타일에 기술까지 더해져 큰 주목을 받았다.
웨어러블 헬스케어업체인 핏빗도 패션브랜드 등과 꾸준히 콜라보레이션 제품을 선보였다. 기존 핏빗의 심플한 디자인은 남성소비자로부터 인정받았지만 여성소비자에게는 외면받았다. 이에 핏빗은 토리버치 디자인이 들어간 팔찌와 목걸이에 핏빗 활동량 측정 센서를 넣어 여성소비자 공략에 나섰다. 이달 초 주얼리브랜드 스와로브스키도 미스핏과 협력해 크리스털이 장식된 첫 스마트 주얼리제품 ‘액티비티 트래킹 주얼리’를 출시했다.
IT업계는 발 빠르게 패션브랜드에서 근무한 전문인력 채용에 나섰다. 명품브랜드의 유통관리 노하우와 패션 노하우를 전수받기 위해서다. 애플은 애플스토어 등 유통전략 강화를 위해 패션브랜드 버버리의 CEO 안젤라 아렌츠를 소매유통 담당으로 끌어들였다. 안젤라는 지난 2006년 버버리에 취임한 후 5년 만에 주가를 186%나 끌어올렸다.
애플은 입생로랑의 CEO 폴 드뇌브와 유럽쪽 유통을 총괄하던 카뜨린느 모니에 사장에게 애플의 웨어러블기기 적용을 담당하는 스페셜 프로젝트팀을 맡겼다. 구글 역시 웨어러블기기의 디자인을 강화하기 위해 디자이너 출신 마케팅전문가를 스카우트했는데 구글글라스 개발에 디자인적으로 큰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IT업계에 패션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만큼 콜라보레이션도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