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중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기인으로 조영남과 송창식이 꼽힌다. 음악에서 남이 따라하기 힘든 영역을 구축했고 일상생활에서도 남이 뭐라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걸었다.

송창식이 개량한복을 입고 밝게 미소 지으며 노래하는 모습은 도인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와 절친한 조영남은 송창식을 ‘일반적인 잣대로는 풀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 했고 ‘외계인이므로 일상 언어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송창식은 자신이 하는 행위나 표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아 기인이라고 불리는 것 같다며 그런 의미에서라면 조영남도 기인이라고 맞받아쳤다.

조영남은 20대 때 맑은 날임에도 우비와 장화를 신고 다니는 등 기인 기질을 일찌감치 드러냈으며 노년이 돼서도 “연예인은 철들면 안된다”고 일갈했다. 청년문화를 이끈 무교동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두 사람이 불렀던 노래들은 지금도 중장년층을 추억과 향수에 젖게 한다.


/사진=머니투데이 이동훈 기자

◆클래식에서 대중음악가로 변신
두 사람 다 음악인으로서의 출발은 클래식이었다. 조영남은 한양대 주최 전국고등학교 음악콩쿨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음대에 특차 입학했다. 그러나 자퇴하고 다시 시험을 치러 서울대 음대에 들어갔다. 그는 한 방송에서 한양대를 자퇴한 이유로 “사랑해선 안될 사랑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약혼자가 있는 여성을 사랑해 학교로부터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킨다는 말을 듣고 자퇴했다는 것.

서울대 음대에 재학 중일 때는 미8군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높은 수입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자퇴했다. 그는 순수음악보다 쉽게 돈 벌 수 있는 대중음악을 택했지만 성악가인 그의 동생은 부산대 음대 교수로 재직했다.


송창식은 자신처럼 클래식음악을 전공하고도 대중가요를 멋있게 부르는 조영남을 보고 자신도 대중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송창식은 아버지 전사 후 부모 없이 음악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성장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 음악가의 꿈을 가졌다.

취미를 붙이자마자 노래와 악보의 관계를 금방 파악해 1년 만에 작곡을 했다. 중학생일 때는 모차르트로 불렸고 경기음악콩쿠르 성악부문 1등을 차지했다.

서울예고 성악과에 진학해 군경유자녀 학비보조금, 장학금, 아르바이트로 학업을 이어가다 가난으로 실기시험을 치르지 못해 결국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송창식과 서울예고 동창인 금난새는 서울대 작곡과에 진학해 오케스트라의 유명 지휘자가 됐다.

금난새는 학창시절 송창식을 회상하며 “음악천재였던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가난해서 매일 수돗물로 배를 채우더라”고 했다. 천재였지만 가난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송창식은 대학생이 아님에도 혼자 캠퍼스를 돌아다니며 노래하다가 세시봉의 MC였던 홍대생 이상벽의 눈에 들어 세시봉에 출연했다. 그곳에서 윤형주를 만나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한국의 ‘사이먼 앤 가펑클’로 불리며 유명세를 탔다.

◆두 기인의 전혀 다른 길

조영남과 송창식은 똑같이 자유인, 기인, 천재, 괴짜로 불리지만 인터뷰 등을 통해 드러난 언행을 보면 성품, 사고방식, 행동양식 등이 전혀 다르다.

조영남은 “내겐 여자가 종교”, “영원한 사랑이란 바람이고 욕심”이라며 자유연애주의자임을 당당히 드러냈다. 2번의 결혼과 2번의 이혼을 거쳐 화려한 솔로로 살고 있다.

탤런트 윤여정과는 세시봉에서 만나 사랑을 키우다 도미해 결혼했다. 그러던 중 18세 연하의 P씨를 만났다. 조영남은 아내(윤여정)에게 “새로 만난 여자가 너무 좋지만 너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며 방 하나를 내어달라는 어이없는 제안을 했다(채널A <라이벌 매치-압도적 7> 2014.8.31).

셋이 살 생각이 없다는 윤여정과 이혼하고 결혼한 두번째 아내 P씨와는 “서로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자”며 각방을 쓰기로 합의한 후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조영남은 “모든 게 좋았는데 아이를 낳겠다고 해서” 두번째 이혼을 했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주변에 여자가 많음을 자랑한다. MBN <속풀이 쇼 동치미>(2014.7.19)에서는 여자친구가 50명 있다고 해 다른 출연자들을 놀라게 했다.

반면 송창식은 남남끼리 만난 부부의 연을 하늘이 점지해준 연분으로 여기며 산다. 그도 인기 정상이던 시절 연예인들과의 염문설이 나왔지만 근거 없는 헛소문으로 일축하고 독신으로 음악에만 전념한다고 선언했다. 이후 불후의 히트곡 ‘고래사냥’, ‘왜 불러’, ‘피리부는 사나이’ 등을 연이어 발표, MBC 10대 가수가요제에서 가수왕에 올랐다. 이후 서울예고 동창이자 스튜어디스 출신 여성과 결혼했다. 그는 “아내 덕에 사는 것이고 장가 가길 잘했다”며 “행복지수를 마누라에 둔다면 만점”이라고 자평했다.

◆가장 돈 없지만 가장 부족하지 않더라

조영남과 송창식의 집은 둘 다 물과 가까이 있는데 사뭇 대조적이다. 한강 조망권이 있는 조영남의 청담동 집은 시가 65억원에 달해 연예인 집값 1위에 올랐다(tvN <명단공개 2015> 2015.3.16). 라틴어로 ’하늘의 침상’이라는 의미를 담은 조영남의 초호화아파트 ‘카일룸’은 고풍스러운 외관과 별도의 정원에 스크린골프연습장, 개인영화관, 피트니스클럽, 비즈니스 미팅룸 등 문화시설을 갖췄다. 대지의 ㎡당 지가는 전국 공동주택 중 4번째로 비싸다.

송창식은 경기도 광주 퇴촌면 개울 옆에 직접 집을 지었다. 송창식은 물가가 시끄러워 별로였지만 아내가 그곳에 집을 짓기를 원했다. 집을 짓기 위해 독학으로 건축설계를 5년간 공부했고 CAD(Computer Aided Design)도 배웠다.

송창식은 미사리의 작은 무대에서 노래 부르며 살아가는데 그와 함께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함춘호는 “돈을 생각하면 하기 힘든 생활”이라고 말했다. “세시봉 4인방 중 가장 돈이 없지만 4명 중 돈이 유일하게 부족하지 않은 분”이라는 말을 덧붙였다(<레이디경향> 2013년 9월호).

그의 앨범을 홍보해주겠다는 TV 출연 섭외를 거절한 적도 많다. 그는 돈 많은 친구들이 더 가지려고 애쓰는 걸 보면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주최하는 공연에 게스트로도 잘 서지 않는 그가 최근 박인희 귀국공연 ‘그리운 사람끼리’에는 흔쾌히 합류했다.

덕분에 필자는 오랜만에 큰 무대에서 송창식이 여러 곡을 부르는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돈에 대한 철학이 잘 드러난 인터뷰가 있다. “나는 일정정도 돈이 생기면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아요. 내가 필요한 만큼만 돈일 뿐 남는 돈은 쓰레기예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해요. 죄는 사실 돈보다 가벼워요. 죄를 가진 사람은 죄를 버리고 싶어하는데 돈 가진 사람은 버리지 않으려고 하잖아요.”(조선일보 2011.2.19)

◆화개장터 노랫말과 너무 달랐던 삶

조영남은 송창식을 일컬어 노래밖에 모르고 음악에 목숨 건 ‘진짜 가수’라고 말했다. 송창식은 50여년간 연습을 건너뛴 날이 하루도 없을 정도로 노력파다.

반면 조영남은 운에 따라 인생이 좌우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세상 잘되는 것과 출세하는 것이 모두 운수와 재수다. 한마디로 운빨이다. 노력해도 안되지만 운수가 좋으면 출세한다. 나는 못생겼어도 운빨이 좋다.”(경기신문, 2016.5.18)

그런 그가 운빨이 다한 걸까. 그의 그림 상당수를 수년간 화가 송씨가 그렸고 그 위에 덧칠과 사인만 해서 판매한 사실이 드러나 검찰에 의해 사기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대작인 줄 모르는 사람에게 1억8000만원 상당을 판매했다는 것이다. 11개 주요 미술단체는 ‘대작이 미술계 관행’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조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여러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위법성 여부는 법원이 가리게 됐다.

조영남은 노래에서도 다른 사람이 쓴 가사를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조영남의 노래 중 가장 크게 히트한 ‘화개장터’(1988년 발표)의 작사가가 조영남으로 등록됐는데 사실은 김한길 전 국회의원이다. 발표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희박할 때였지만 그래도 거짓말을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김한길은 KBS 2TV <승승장구>(2011.10.4)에서 “(내가) 화개장터를 작사했는데 조영남은 ‘사랑 노래 불러도 뜰까 말까인데 이런 건전가요는 택도 없다”며 핀잔을 줬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음반에 넣을 곡이 부족해 어쩔 수 없이 들어간 이 노래가 조영남 최대 히트곡이 됐다. 진행자들은 “저작권료가 엄청날 것 같다”고 말했지만 김한길이 받은 저작권료는 한푼도 없다.

조영남의 돈에 대한 성향은 수백만원이 넘는 가격에 판매한 그림의 대작화가에게 불과 점당 10만원만 준 것이나 윤여정과 이혼할 당시 신동아아파트 전셋값이 5500만원이었는데 5000만원을 위자료로 준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화개장터는 노래 가사처럼 경상도와 전라도가 만나 동서화합을 이루는 상징적인 장소가 됐다. 하동군 화개장터가 있던 자리에 2000년 세워진 노래비에 쓰인 작사자는 여전히 조영남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4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