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유착은 '인정', 해명 능력은 '제각각'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총수 9명이 동시에 증인으로 출석한 국회 ‘최순실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서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총수들의 민낯이 드러났다. 핵심 쟁점이었던 미르·K스포츠재단 자금 출연 ‘대가성’에 대해선 모든 총수들이 ‘모르쇠’ 혹은 ‘부인’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정경유착’이라는 구시대적 관행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대체로 ‘인정’했다. 또 13시간가량 진행된 청문회 질의응답 과정에서 총수 개개인의 언변, 성향, 경영능력 등도 어느 정도 공개됐다.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조사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총수 9명이 증인선서를 하고 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이재용 청문회’, 쏟아진 질의에 진땀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조 청문회는 사실상 ‘이재용 청문회’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질문이 집중됐다. 두 재단에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204억원)한 것 외에도 대기업 중 유일하게 최순실씨 측에 직접 51억원가량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7명의 국조 특위 위원들은 이 부회장에게 ▲자금 출연 배경 및 결정권자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시 국민연금 ‘찬성’ 배경 ▲삼성 지배구조 및 승계 문제 등 비슷한 질의를 반복하며 집중 추궁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한결같았다.


이 부회장은 특위 위원들의 집중 질의에 “송구스럽지만 잘 모르겠다”, “기억이 없다”,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잘 하겠다”, “제가 부족한 게 많다” 등의 답변을 되풀이했다.

결국 이 부회장은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으로부터 “하루 종일 사지선다형 답만 하는데 ‘돌려막기 재용’, ‘동문서답 재용’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싶다”며 “이는 무능하거나 아니면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발언 중 의미 있는 내용은 “개인적으로 전경련 활동을 하지 않겠다”, “미래전략실을 해체하겠다” “(검찰 조사 결과) 문제가 드러나면 저를 포함해 관련자 모두 책임을 지겠다” 정도로 요약된다.


이에 대해 야당 특위 위원들은 “중요한 내용은 기억을 잘 못하고, 경영능력도 증명되지 않았고, 사태 수습도 미흡하다”고 혹평했다.

가장 고령자였던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78)은 1988년 ‘일해재단 청문회’에 부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데 이어 28년 만에 열린 재벌총수 청문회에 2대째 증인으로 출석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이날 정 회장은 이 부회장에게 질문이 집중된 탓에 거의 질의를 받지 않았지만 몇 안되는 질의에도 동문서답, 횡설수설하는 모습을 보여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았다.

이완영 새누리당 의원의 “두 재단 자금 출연이 세무조사를 피하기 위함인가”라는 질문에 정 회장은 “여태 우리가 필요한 나이 많이 든 사람이나 경제적으로 하지 않는 그건 자주 기금을 (출연)하고 그런다. 언론이나 이런 데서도 기금을 내서 휴일이나 크리스마스에 기금도 하고…. 나중에 우리가 하는 걸 다각적으로 1~2년 동안 보고를 드리겠다”고 횡설수설했다.

또 정 회장은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의 “전경련 탈퇴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의에는 “우리는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 의사는 있다, 비용에서…” 등의 동문서답을 했다. 

이에 대해 하 의원은 “정 회장이 연기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이독경’ 수준”이라며 “질문을 알아듣게 하는 게 힘들었는데 이런 수준이면 대통령과 독대에서 소통이 됐는지 의문이다. 이제는 경영 은퇴를 선언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질타했다.

◆소신 발언, 조목조목 해명도 나와

반면 다른 고령자였던 손경식 CJ그룹 회장(77), 구본무 LG그룹 회장(71),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68)은 특위 위원들의 질의에 분명하고 소신있는 답변을 내놔 눈길을 끌었다.

손 회장은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경영에서 물러난 것과 관련해 “청와대의 압박을 거스를 수 없었다”며 “군부독재 시절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고 청와대의 경영 개입 사실을 털어놨다. 

이어 손 회장은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올해 광복절 특별사면이 두 재단에 대한 지원과 관계 있는 것 아니냐”는 질의에는 “(사전에) 청와대와 논의한 적 없고 재상고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고 해 포기하던 찰나에 언론에서 사면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와 그 길밖에 없다는 생각에 재상고를 철회했다”고 강조했다.

구 회장은 정경유착 창구라는 지적을 받는 전경련 개혁 방안에 대해 “미국의 헤리티지재단처럼 싱크탱크 역할만 하는 재계 친목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다”고 소신을 밝혔다. 아울러 정부가 기업들에게 준조세를 걷는 것과 관련해선 “국회가 입법을 통해 막아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조 회장은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조기 사퇴와 한진해운 사태 등에 대한 질의를 받고 조목조목 해명했다. 그는 정부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사퇴하라는 통보를 받고 임명권자(대통령)의 뜻이라 생각해 물러났다”고 답했다.

또 한진해운 사태에 대해선 “에쓰오일 주식을 전부 팔아 1조원가량의 돈을 투입했고 추가로 1조원을 더 지원했다”며 “해외 경쟁사들은 정부에서 3조~30조원에 달하는 지원을 받으며 저가 정책을 펼치는데 개인 기업으로선 같이 출혈 경쟁을 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해명했다.

최태원·신동빈·김승연 회장은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보였다. 최 회장은 “두 재단에 대한 자금 지원은 제가 결정한 게 아니고 추가 지원 논의 부분은 문제가 되고 나서 보고를 받았다”고 관련성을 단호히 부인했다.

김 회장과 신 회장은 특위 위원들의 질의에 ‘네’ 혹은 ‘아니다’ 단답형으로 입장을 뚜렷이 밝히거나 민감한 질의는 ‘모른다’고 답했다.

전경련 회장을 맡고 있는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물의를 일으켜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청와대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게 기업인들의 입장”이라며 어쩔 수 없는 정경유착이 있었음을 시인했다.

한편 재계 안팎에선 이번 청문회가 외신을 통해 해외에도 알려지며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재계 한 관계자는 “해외 비즈니스 파트너들도 외신을 통해 이번 청문회를 관심있게 지켜봤을 것”이라며 “아직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인 사안이지만 부패한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기업 이미지나 사업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