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가 불황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기업은 구조조정으로 수익을 내고 빚에 눌린 가계는 지갑을 꽁꽁 닫았다. 암울한 상황은 다음 정부에 더 큰 재앙으로 다가온다. 저출산·고령화 문제로 줄어든 생산인구에게 경제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머니S>는 만성불황의 터널에 갇힌 국민과 기업의 현주소를 알아보고 정부정책, 나아가 대선주자들의 경제공약을 진단했다. 또 전문가 인터뷰를 통해 선진국이 경기부양에 구사하는 전략을 살펴봤다.<편집자주>
# 직장생활 11년차 김 과장은 요즘 회사 후배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친한 동료끼리 밥값을 더치페이하고 어떤 때는 자기가 먹은 만큼만 카드로 결제한다. 이런 문화가 그에게는 낯설다. 김 과장이 신입사원 때는 선배가 밥값을 내주거나 서로 번갈아 내는 것이 자연스러웠기 때문. 언제부턴가 사내 회식도 사라져 동료들과 친해질 기회가 없다. 그는 몇년째 동결된 연봉과 빠듯한 생활비를 생각하면 쓸데없는 지출이 줄어든 것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 “10년 전만 해도 여의도 증권가는 밤늦도록 불 켜진 빌딩이 즐비했죠. 실제로는 야근을 안하는데 고위임원이나 경쟁사들에 보이려고 일부러 소등하지 않은 채 퇴근하는 게 관행이었거든요.” 하지만 몇년 전부터 여의도 증권가에서 불 켜진 빌딩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심지어 야근을 해도 전기절약을 위해 불필요한 점등을 금지한다. 복사나 인쇄를 할 때는 이면지를 활용하라는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있다. 불황의 단면이다.
◆소비위축으로 폐업하는 사업체 속출
끝을 알 수 없는 불황이 소비시장과 기업문화의 풍경을 바꿔놨다. 가계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기업도 회식, 2차, 송년회 문화가 사라지는 등 소비위축 현상이 빠르게 나타난다.
국세청 조사 결과 올 1월 생활밀접업종 사업자 중 일반주점은 1년 만에 6.1% 감소해 5만5761명을 기록했다. 하루 평균 약 10곳의 가게가 문을 닫은 것이다.
동네 구멍가게만 위태로운 것이 아니다. 국내 자본시장의 메카인 여의도 증권가는 2000년대 후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감원바람이 사그라질 줄 모른다. 한때 ‘신의 직업’으로 불리던 애널리스트는 구조조정 1순위로 내몰렸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등록 애널리스트는 2010년 이후 23.3% 감소해 현재 1121명으로 줄어들었다.
미래에셋대우, KB증권 등과 같은 대형 금융투자회사의 합병이 이뤄졌고 토러스투자증권 등 소형증권사는 리서치센터를 폐지하기도 했다.
◆연봉동결·물가인상에 빚내 생활비 마련
최근 취업포털 사람인이 370개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기업의 40.5%는 올해 연봉을 동결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연봉을 삭감한다는 기업도 1.1%였다. 반면 2014~2017년 물가상승률은 0.7~1.3%를 기록 중이다. 지난해 서울의 집값상승률은 3.10%, 전셋값상승률은 1.32%로 나타났다.
소득은 제자리걸음인데 물가와 주거비 부담이 늘자 이는 고스란히 가계빚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가계부채는 역대 최고치인 1344조3000억원에 달했고 이 중 51%가 주택담보대출로 나타났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가계부채 증가가 생계비와 연관이 있다는 것. 지난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KEB하나·우리·NH농협) 조사에 따르면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생활비를 목적으로 빌린 돈이 1년 사이 6.6% 증가해 135조5987억원을 기록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서 보면 신용대출에 비해 담보대출의 회수 가능성이 높지만 생활자금이 필요해 담보대출을 받았을 때 경기가 더 악화되면 차주의 상환능력이 떨어지거나 연체가 발생할 위험이 커 가계부채의 부실화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 이익 늘었는데 가계엔 그림자
아이러니한 것은 불황이 깊어지는 중에도 기업들은 이익이 늘었다는 사실이다. 한국거래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상장기업의 순이익은 사상 최대인 100조원을 돌파했다. 코스피 상장기업 533곳은 연결기준 매출액이 전년대비 0.8% 증가했다. 눈여겨볼 점은 영업이익이 같은 기간 15% 급증해 121조원에 달했다는 것. 매출은 거의 늘지 않고 영업이익이 급증한 ‘불황형 흑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올 상반기 대기업의 취업문은 더 좁아질 전망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국내 500대기업의 채용계획을 조사한 결과 응답한 주요기업 중 22.5%가 지난해보다 채용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뽑지 않을 예정이다. 이는 지난해 3월 조사와 비교할 때 두배 가까이 늘어난 수준이다. 채용을 줄이는 이유로 기업들은 ‘경기 악화’(34.2%), ‘회사 내부상황의 어려움’(31.6%) 등을 꼽았다.
이뿐만 아니라 기업들은 배당을 줄이면서 유보금을 늘리고 있다. 미국 전미경제연구소(NBER)가 최근 발행한 ‘글로벌기업의 저축 증가’ 보고서를 보면 기업의 저축은 1980년대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불과했으나 2010년대 15%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가계 및 비영리기구’의 저축률은 6%포인트가량 하락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의 저축률 증가는 국적이나 업종과는 무관하게 나타났다. 국경 간 소득이전 규모가 큰 다국적기업과 내수기업 모두 비슷하다는 것. 보고서는 기업의 저축이 늘어난 것은 영업이익이 급증한 반면 배당이나 법인세 등 지출 증가속도가 이보다 느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국내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을 보면 비금융기업과 가계의 저축액은 1990년대 중반 비슷한 규모였다가 점점 차이가 벌어져 지난해 기업의 저축액이 가계의 2.1배를 넘는 296조6000억원을 기록했다. 한국은행이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2013년 국가별 저축 증가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11.5%), 미국(5.4%), 독일(2.8%), 일본(0.5%) 순으로 나타났다. 한은은 이런 현상에 대해 경기 불확실성으로 기업의 위험회피 성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