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장충동 성곽이 사유지와 사유재산으로 바뀐 사정은 이렇다. 일제 관리들이 이곳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부터였다. 도심에 가깝고 자연환경이 보존된 장충동 일원은 구한말을 거쳐 일제강점기 초까지도 주거지로 개발되지 않은 한적한 곳이어서 기존 주택지를 재개발하는 것보다 유리했다. 게다가 당시는 특권층을 위한 서양식문화주택이 인기였다. 이른바 ‘문화주택지’라는 명목으로 택지가 개발되면서 장충동 일원의 도성성곽이 파괴됐다.


1934년 6월 ‘조선도시경영회사’가 장충동 택지개발에 착공하면서 이 일대의 서울성곽은 점차 모습을 감췄다. 당시 이곳 주택지의 한가구당 필지는 1653㎡로 꽤 넓었다. 장충동 성곽 터를 집터로 허가해준 자들은 일본관리나 회사원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1960~1970년대 경제개발시기에 신축된 주택들도 성벽을 파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문화재’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의 눈에는 간직해야 할 ‘역사와 전통’이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커다란 성돌은 어디서 왔을까

성당길을 지나면 왕복8차선 동호로가 나오고 이 길을 건너면 장충체육관 가기 전 남쪽으로 완전히 복원된 성곽이 나타난다. 거기서부터는 도성 밖으로 성곽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있다. 이 길을 걸으면 옛 성벽과 최근 복원된 성벽이 대비돼 세월의 변천과 무상함을 볼 수 있다. 낙산구간에서 가톨릭대학교의 담장이 된 성벽을 보듯 이 구간에서도 신라호텔의 담장이 된 성벽을 볼 수 있다. 약 500m를 지나 신라호텔의 후원이 끝나는 지점에서 암문을 만난다.


/사진=뉴시스 박상훈 기자

언덕 입구에서 성곽 하단부 성돌에 뚫린 세개의 구멍이 보인다. 돌을 캐기 위해 나무를 박았던 쐐기구멍이다. 이간수문에서도 이와 같은 성돌의 흔적이 있다. 큰 바위를 쪼갤 때는 정(釘)으로 구멍을 낸 다음 주로 밤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붓는다. 시간이 지나면 나무가 불어나는 힘으로 바위가 쪼개지는데 이를 두고 ‘돌을 뜬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바위를 깨트려서 석재를 떠내는 일을 채석(採石) 대신 ‘부석’(浮石)또는 ‘벌석’(伐石)이라 했다. 이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인 부석소는 어디에 있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도성 밖 일정구간까지 개발을 제한했다. 그 구간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다. 요즘의 그린벨트와 같은 개념이다. 동쪽으로는 수유고개와 중랑천, 서쪽은 마포 망원정, 남쪽으로는 한강, 북쪽으로는 보현봉과 은평구 대조동 관고개까지를 말한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동대문구, 서대문구, 마포구, 영등포구, 용산구, 성북구, 강북구, 은평구 등에 해당한다. 따라서 부석소는 이 지역 밖에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후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할 때는 창의문 밖에 두기도 했고 숙종 때 도성 보수를 할 때는 정릉 근처의 청수동에 뒀다. 돌의 수요가 많을 때에는 성저십리 안쪽에 부석소를 두기도 했다.

부석소에서 뜬 돌은 소가 끄는 수레로 성벽 가까이 운반했고 거기서부터는 인부들이 목도로 옮겼다. 운반하는 중에 무거운 성돌에 깔려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남산성곽길에서 만나는 각자성석

동호로 건너 성곽길부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정문까지 각자성석을 볼 수 있다. 백악산 정상에서 天(천)자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타락산, 목멱산, 인왕산을 지나 다시 백악산 원점으로 돌아가며 마지막 97번째 弔(조)자로 끝나는 각자성석은 97개 군현의 구간별 표시다.


장충동성곽의 각자성석 경산시면.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이곳 각자성석의 천자문 순서를 보면 ‘생자육백척’(生字六百尺)은 천자문의 42번째인 날 생(生)자로 그 순번에 해당하는 군현의 백성이 600척을 쌓았다는 것을 뜻한다. 물 수(水)자는 44번째, 산 이름 곤(崑)자는 47번째, 언덕 강(崗)자는 48번째, 칼 검(劍)자는 49번째 글자에 해당한다.
특이한 각자성석이 있다. 경산시면과 연일시면 사이에 있는 ‘십삼수음시’(十三受音始)라는 각자다. 이것은 천자문 순서도 아니고 군현의 이름도 아니다. 수음이란 ‘구간’이라는 우리말을 이두(吏讀)식으로 쓴 것이다. 수음을 빨리 발음하면 ‘숨’이 되는데 숨이란 ‘한숨 돌리다’ 또는 ‘한숨 쉬어가자’의 숨처럼 짧은 시간이나 공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구간은 열세번째 소구간의 시작점이며 600척의 큰 구간을 100척 정도로 다시 나눈 소구간이 된다.

그런데 검자육백척(劍字六百尺)과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의 성석은 다른 곳에 있다. 전자는 반얀트리클럽&스파서울호텔 건물 뒤편 계단 축대에 있고 후자는 자유센터 정문 안 바로 오른쪽 축대에 있다. 또 경주시(慶州始)라는 각자성석은 자유센터 담장에서 발견된다. 타워호텔을 지을 때 그곳에 있던 성곽을 허물고 그 성돌을 이곳으로 옮겨 축대와 담장을 쌓았던 것은 아닐까. 사정이 이렇다면 유네스코문화유산 등재에 앞서 지금이라도 호텔담장으로 쌓은 이 성돌을 제 자리로 옮겨 성곽을 복원해야 한다.

군현의 이름이 새겨진 성돌을 살펴본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군현의 순서를 따라가 보자. 맨 처음의 해진시면(海珍始面)은 당시 전라도 해진현(海珍縣)으로 지금의 해남군과 진도군을 통합한 지역이다. 그 다음의 함안시면(咸安始面)부터 경주시면(慶州始面)까지는 모두 경상도에 있는 군현들이다. 이 구간의 성곽 축성을 맡았던 군현이 경상도에 속해있었다. 오늘날의 지명과 맞춰보면 함안은 경남 함안군, 의령은 경남 의령군, 경산은 경북 경산시, 연일은 경북 포항시 연일읍, 흥해는 경북 포항시 흥해읍, 순흥은 경북 영주시 순흥면, 하양은 경북 경산시 하양읍, 기장은 부산 기장군, 울산은 울산광역시, 예천은 경북 예천군, 성주는 경북 성주군, 선산은 경북 선산군, 경주는 경북 경주시와 같다.

이 가운데서 해진시면 구간은 언제 쌓은 것일까. 생(生)자가 새겨진 성벽구간은 태조 5년 때는 경상도 담당구간이었고 세종 4년 때는 전라도 담당구간이었으니 해진시면의 각자성석은 세종 4년 때의 성돌이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9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