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은행장’이라는 별칭까지 붙었던 금융전문가 하영구 은행연합회장이 위기에 빠졌다.

새정부 출범 이후 오락가락 갈지자 행보를 보여 그동안 쌓아온 맏형 리더십에 의문이 제기된다. 34년간 은행에서 한 우물만 판 하 회장의 뱅커이미지도 탈색될 위기에 처했다.


◆성과연봉제, 직무급제 입장전환

하 행장을 둘러싼 논란의 핵은 박근혜정부 시절 추진한 성과연봉제다. 하 회장은 지난해 금융당국과 민간은행 성과연봉제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3월까지 은행에 도입 방안 마련을 요구했다. 그러나 성과연봉제를 도입한 은행이 한 곳도 없어 효과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새 정부가 공공기관 성과연봉제 도입을 철회하면서 금융당국도 은행권 성과연봉제 도입 폐지를 검토 중이다. 하 회장이 추진한 성과연봉제도 동력을 잃은 셈이다.


결국 하 회장은 성과연봉제 대신 직무급제 도입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직무별 전문성과 난이도에 따라 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 골자다. 조만간 금융위원회는 은행연합회와 함께 직무급제 가이드라인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직무급제 도입에도 난항이 예상된다.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면 17개 은행이 사용자협의회에 재가입 후 노조와 논의해야 하는데 노조가 동의할 만한 공정성 확보가 까다롭다.

새롭게 거론된 직무급제는 성과연봉제냐, 성과에 기반한 시스템이냐에 대한 개념 차이는 있지만 은행권 내부에서는 은행원들의 임금보수를 개선하는 제도 도입 자체를 놓고 은행권 여전히 의견이 갈린다.

더욱이 하 회장이 새정부 출범 후 성과연봉제 대신 임금체계 유연성 제고와 직무급제 도입으로 방향을 돌려 노사가 합의하지 않을 경우 제3의 보수체계가 또다시 거론될 수 있다는 불신이 팽배하다.

은행권 관계자는 “하 회장이 임금체계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으로 성과연봉제 도입을 강행하다가 정부의 정책변화에 입장을 슬그머니 바꿨다”며 “직무급제 역시 노사 합의가 필요한 데 또 한번의 강압적인 임금체계 도입이 얼마나 공감을 받을지 미지수”라고 지적했다.


하영구 은행연합회장. /사진=머니투데이 DB

◆2년 반 만에 대출금리 규제 꺼내
은행 자율경영으로 분류되던 대출금리 산정도 규제 대상에 올라 하 회장에 날선 비난이 쏟아진다.

은행연합회는 이달부터 은행의 가산금리와 연체금리 산정을 규제하는 모범규준을 시행했다. 금융당국이 은행권의 대출금리 규제를 위해 은행연합회의 모범규준을 개정한 탓이다.

은행권의 대출금리는 2014년 11월 금융당국이 ‘금융감독관행 혁신을 위한 가이드라인·매뉴얼 개선방향’으로 시장에 자율운영을 맡겼으나 2년 반 만에 규제로 방향을 틀었다. 올 하반기에는 연체금리 산정에 기준이 되는 모범규준도 추가돼 은행 규제가 더 강화된다.

시중은행은 앞으로 가산금리를 올릴 때마다 리스크 관리·대출상품·여신심사 담당 임원 등으로 구성된 내부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야 한다.

금융당국이 가산금리 체계도 은행연합회의 모범규준으로 간접규제에 나서 연체금리 산정 역시 심사위원회의 심사 절차가 추가될 전망이다.

은행권은 은행연합회를 통한 금융당국의 간접규제에 꼼수 논란을 제기한다. 국무총리훈령 금융규제 운영규정에 따르면 ‘금리·수수료 등 금융회사 등이 정하는 금융상품의 가격 등에 대한 금융행정지도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당국이 연합회의 모범규준을 개정하면서 직접 손을 쓰지 않고도 은행의 대출금리 산정을 관리할 수 있게 됐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 회원사 회비로 운영되는 은행연합회가 은행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금융당국의 규제채널이 된 것 같아 씁쓸하다”며 “하 회장이 올해 32년 만에 연합회의 로고(CI)와 비전을 교체하는 대대적인 혁신에 나섰지만 회원사들의 사정은 더 어려워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정부 입김, 하 회장도 못 피해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은행연합회는 회장 추천위원회를 설립해 차기 회장을 선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금융당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업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새로운 회장선임을 준비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은행연합회장 선출은 22개 회원사가 총회를 열고 추대하는 방식이다. 선출 절차와 과정은 비공개로 진행돼 투명성 논란이 꾸준히 제기됐다.

하 회장은 11년 만에 낙하산 인사를 제치고 등장한 민간은행장 출신이다. 그러나 연합회 내부에선 회추위를 설립해 회장 후보를 공모하고 검증하는 절차를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하 회장 역시 금융당국의 임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하 회장은 이사회가 열리기 전 일찌감치 내정 소식이 전해져 낙하산 논란이 제기된 바 있다. 그는 2014년 은행연합회장 취임 당시 정치 인맥과 금융당국 고위관계자와의 인연이 부각되면서 ‘무늬만 민간’ 출신인 관치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이는 KB금융지주 회장 낙마의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은행연합회장 선임절차는 정관에 규정되기 때문에 이를 변경하려면 회원은행 3분의1의 발의를 거쳐 총회에서 3분의2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주무관청인 금융위원회의 승인도 필요하다.

은행연합회는 회추위 설립에 대해 논의단계라고 선을 긋는다. 다만 하 회장의 임기가 5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새정부의 금융정책에 대응할 수 있는 차기 회장 선임을 위해 조만간 회추위 설립이 본격화될 전망이다.

하 회장의 퇴임에도 이목이 쏠린다.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선 그동안 어지럽게 펼쳐놓은 정책을 재정비해야 한다. 정부의 입김에 휘둘려 회원사와 연합회에 혼란을 안긴 불명예 회장으로 퇴진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프로필
▲1976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1981년 미국 노스웨스턴 경영대학원(MBA) 졸업 ▲1986년 씨티은행 한국 자금담당 총괄 이사 ▲1987년 씨티은행 한국 투자금융 그룹 대표 ▲1997년 씨티은행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지역본부 임원 ▲1998년 씨티은행 한국 소비자금융 그룹 대표 ▲2001년 한미은행장 ▲2004년 한국씨티은행장 ▲2010년 한국씨티금융지주 회장 ▲2014년 전국은행연합회장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9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