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하는 카드수수료 인하정책으로 신용카드사가 허리띠를 조이자 밴(VAN)사와 밴 대리점이 위기에 봉착했다. 정부가 카드사의 주수익원인 신용카드 가맹점수수료 우대범위를 확대한 데 이어 앞으로 수수료율을 더 낮출 예정인 가운데 카드사가 비용절감 차원에서 밴 대행업무를 축소하고 나서서다. 밴사와 밴 대리점은 주수익원에 직격탄을 맞자 카드사의 방침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밴사는 카드사로부터 카드결제 승인·전표 매입업무를 위탁받은 업체로 가맹점에 카드결제정보망(부가가치통신망)을 설치하고 가맹점과 카드사간 결제정보를 중개하는 역할을 한다. 밴 대리점은 매출전표 수거·가맹점 카드단말기 관리 등의 업무를 밴사로부터 위탁받아 담당한다.
◆카드사, 매출전표 직매입 추진
신한카드는 지난 6월부터 전국 6만개 가맹점을 대상으로 신용카드 전표 직매입을 시범운영 중이다. KB국민카드와 삼성카드 등의 대형업체도 전표 직매입을 추진 중인 만큼 업계 1위인 신한카드의 움직임에 따라 전표 직매입 도입이 카드업계에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전표 직매입은 카드사가 밴사를 거치지 않고 전표를 직접 매입하는 시스템이다. 이를테면 A씨가 B가맹점에서 물건을 사기 위해 C카드사의 신용카드를 가맹점주에 건넸다고 가정하자. B가맹점주가 A씨의 카드를 결제단말기에 읽히면 C카드사는 밴사가 깔아놓은 결제중개망을 통해 A씨의 ‘크레딧’(신용)정보를 전달받는다. A씨가 C카드사로부터 부여받은 신용공여한도를 넘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C카드사가 결제승인을 내리면 B가맹점주는 A씨에게 당장 돈을 받지 않더라도 물건을 판매한다. 이게 ‘카드결제 승인’ 절차로 밴사의 주요업무다.
물건을 판 B가맹점은 고객이 결제한 후 이틀 이내 카드사로부터 물건값을 받는다. C카드사는 이후 A씨로부터 카드대금을 받아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게 가맹점의 매출전표다. 그런데 신용카드사가 국내 220여만개 가맹점의 매출전표를 직접 수거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대행하는 곳이 바로 밴사다. 즉 밴 대리점은 각 가맹점을 직접 찾아 전표를 수거하고 단말기를 설치·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신한카드가 전표를 직접 매입하겠다는 건 중간의 밴사와 밴 대리점에 해당 업무를 위탁하지 않음으로써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취지다.
◆밴 대리점 “도산 업체 속출할 것”
카드사들은 EDI(전자문서교환) 가맹점이 늘어나는 상황이어서 전자전표를 직접 매입하는 게 유리하다는 입장이다. 기존의 가맹점에선 고객이 카드로 결제하면 3개의 전표가 출력됐다. 고객용 1개, 가맹점용 1개, 카드사용 1개다. 이 중 카드사용 전표는 밴 대리점이 수거해 카드사로 보낸다.
그런데 EDI가맹점에서는 고객용 전표 1개만 출력되며 전표정보는 전자로 저장된다. 이때 사용되는 게 ‘데이터 캡처’ 기술인데 신한카드는 케이알시스와 업무위탁 계약을 맺었다. 신한카드가 케이알시스에 건네는 수수료는 기존 밴 대리점에 건네는 수수료보다 절반 이상 낮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밴사와 밴 대리점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카드사는 밴사에 내는 수수료를 줄일 수 있지만 밴사로선 수익이 악화될 수밖에 없어서다. 밴사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밴 대리점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밴 대리점협회인 한국신용카드조회기협회가 지난 7월 말 신한카드에 전표 직매입 방침을 철회하지 않으면 신규가맹점 모집과 관리업무를 일체 중단하겠다며 강하게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한카드는 시범운영 중인 전표 직매입시스템 도입을 철회하는 안과 다른 대안을 놓고 9월 말까지 협회와 협의할 방침이다.
조영석 신용카드조회기협회 사무국장은 “전국 밴 대리점이 3000여곳이고 종사자는 2만여명에 이른다”며 “이들 대부분이 영세사업자인데 직매입을 도입하면 도산하는 밴 대리점이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사무국장은 이어 “카드승인과 매입업무 중 데이터캡처 부문만 떼내 그만큼 돈을 안주겠다고 하는데 가맹점 민원이나 단말기 관리비용을 밴 대리점이 충당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카드사 “기술발전, 직매입은 당연”
밴업계의 반발에도 카드업계는 전표 직매입 도입이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정부의 가맹점수수료 인하정책으로 수익악화가 예상되는 가운데 비용절감을 위한 방책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에 인터넷전문은행이 밴사와 전자지급결제대행사(PG사) 등 중간거래자를 없애 가맹점수수료를 대폭 줄인 신용카드업무를 준비 중이어서 카드사로선 파이를 빼앗길 위협마저 느끼는 상황이다.
신한카드 관계자는 “전표 직매입은 비용절감 차원이기도 하지만 달라진 영업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발전된 기술을 적용하려는 것”이라며 “20~30년 전 도입된 결제방식을 지금까지 유지할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직매입 도입과 관련된 사항은 밴업계와 긴밀히 협의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카드업계는 직매입 도입을 추진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어서 밴업계와 카드업계간 갈등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카드사들은 신한카드가 어떻게 대응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만약 신한카드가 직매입을 도입하면 다른 카드사도 따라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성원 한국신용카드밴협회 사무국장은 “밴 대리점은 카드부정사용 책임도 진다. 가맹점이 지닌 전표와 카드사가 가져가는 전표 매칭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고객이 결제한 금액을 밴 대리점이 대신 지불해야 한다”며 “카드사가 EDI가맹점의 전표를 직접 수거할 거라면 가맹점 모집·관리 등 매입업무 전체를 맡아야지 수거업무만 직접 하고 나머지 매입업무를 밴업계에 그대로 맡기면 앞으로 문제가 생길 때 책임 소재가 불명확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식 상명대 교수(신용카드학회장)는 “카드사의 직매입 도입은 가맹점수수료 인하에 따른 자구책”이라며 “가맹점수수료가 인하되면 우리나라와 같은 3당사자 체제에선 이 같은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카드사와 밴사간 협약 시 업무분담을 재설정하고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3호(2017년 8월30일~9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