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확 트인 북악산 /사진=뉴시스 배훈식 기자

백악산 정상에는 ‘백악산 해발 342m’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백악마루다. 그동안 불러온 북악산과 백악산은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먼저 일제가 원래 백악산의 이름을 폄하하기 위해 북악산으로 바꿨고 36년이라는 긴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어느 새 북악산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백악산(白岳山·白嶽山)의 ‘백’자에는 하얗다는 뜻도 있지만 깨끗하다는 뜻도 있다. 반면 북악산(北嶽山)의 ‘북’자에는 북녘의 의미와 함께 ‘도망치다’, ‘달아나다’라는 뜻도 있어 부정적인 이름으로 바꿨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 설의 근거가 확실한 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도 백악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북악산을 썼다. 영조 12년(1736) 5월13일 실록과 정조 18년(1794) 2월20일 실록에서도 북악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2007년 4월 문화재청은 백악산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 및 명승 제10호’로 지정했다. 이런 조치는 북악산이라는 이름이 격이 떨어져서라기보다는 천도 초기 도성 축성의 개념인 내사산 보존이란 의미와 여러 고지도, 문헌 등의 사료에서 일반적으로 기록했던 지명을 되살리는 차원에서 마련됐다. 

아울러 ‘北岳’(북악)과 ‘北嶽’(북악) 중 어느 것이 맞는 표기인가 하는 것도 논의될 점인데, 그 표기는 시대와 상관없이 혼용됐다. ‘白岳山’(백악산)과 ‘白嶽山’(백악산)도 같은 맥락에서 둘 다 맞는 표기다. 
1.21사태 소나무 /사진=허창무씨 제공

◆ 백악산의 각자성석
처음 한양도성을 쌓을 때 전체 공사구간을 지방 군현의 수(數)인 97로 나눈 뒤 기점인 백악마루에서 天(천)자로 시작했다. 끝나는 지점은 97번째의 弔(조)자 구간으로 그 역시 백악마루에서 끝나도록 했다. 성곽탐방로도 그 궤도를 따라간다. 시계방향이다.


백악마루에서 동쪽 청운대로 내려가면 1‧21사태 소나무가 있다. 그 앞의 표지판에는 “1968년 1월21일, 북한 124군부대의 김신조 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해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수령 200년 된 이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았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고 부른다."고 쓰여있다. 당시 생포돼 귀순한 이가 김신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한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으며 강북인구를 강남으로 이주시키는 ‘강남개발’을 추진했다. 또 청와대 뒤편 평창동 지역을 개발하도록 허용했다. 인가와 건물이 없어 공비들이 침입하기에 유리했던 환경을 바꾸려는 정책이었다. 부자들은 그때까지 오염되지 않고 경관이 빼어난 평창동에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당시 들어선 크고 작은 건물은 결국 수려했던 북한산의 경치를 크게 훼손하고 말았다.

1‧21사태 소나무를 지나 청운대에 도착하기 직전 왼쪽에 각자성석이 보인다. 그곳 성벽에는 ‘嘉慶九年(가경구년) 甲子十月日(갑자시월일) 牌將(패장) 吳再敏(오재민) 監官(감관) 李東翰(이동한) 邊手(변수) 龍聖輝(용성휘)’라는 한자가 새겨져있다.

가경구년은 청나라의 연호로 조선의 연도로 환산하면 순조 4년(1804)에 해당한다. 패장은 단위부대의 지휘자로 당시 도성수축 공사를 관리했고 감관은 그 공사를 감독한 관리였다. 변수는 목수 및 석수 등 기술자의 우두머리를 일컫는다. 이처럼 국가적인 대토목공사의 공사실명제는 백악구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청운대 표지석 /사진=허창무씨 제공

◆빼어난 전망의 청운대
각자성석을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쉬어가기 좋은 청운대가 나온다. 푸른 하늘에 뜬 흰 구름을 바라보기 좋은 장소라는 뜻일까. 정설은 없다. 백악마루의 해발고도가 342m이고 청운대는 293m다. 이곳에서는 경복궁과 광화문의 남쪽으로 뻗은 육조대로(六曹大路: 세종로)를 일직선으로 내려다볼 수 있다.

청운대에서는 성 밖 북쪽으로 돌출한 ‘곡성’과 우거진 숲의 잎이 지는 가을부터 봄까지 보이는 촛대바위며 오른쪽 능선에 약간 튀어나온 ‘부아암’이 보인다. 해태바위라고도 부르는 부아암은 아이를 업은 모양과 비슷해 붙은 이름이다.

백악산은 법궁인 경복궁의 주산이지만 경복궁과 일직선상에 있지 않다. ‘태조실록’에도 백악산에서 내려다봤을 때 “경복궁이 임좌병향(壬坐丙向)해 자리 잡았다”고 기록됐다. 이를테면 경복궁은 백악산의 정남이 아니라 남동쪽으로 15도 방향에 자리 잡았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백악산의 정상이 아니라 동쪽으로 좀 내려온 자리에서 봐야 일직선이 된다는 것. 그 자리가 바로 청운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1호(2018년 5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