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 세기 전 역사를 둘러보는 특별한 하루를 계획하는 이가 많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역사현장을 직접 돌아보는 것은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의미 있는 시간일 터. 그러나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순국기념관 등 너무 많은 곳이 떠올라 고르기 어렵다면 정동길 답사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대한제국 성립 즈음, 개혁운동의 진원지로 떠오른 정동(貞洞) 일대는 한국근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담은 지역이다. 1883년 10월 조영수호통상조약 체결된 뒤 도성 안으로 들어온 서양인이 정동에 둥지를 틀며 신식학교와 개신교회가 생겼고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들어섰다. 

서구문화 수용의 전진기지로 개항기 한국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정동은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의 정치1번지로 우뚝 서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해방직후 김구 선생의 거처였던 경교장도 서대문 길목에 있으니. 서대문에서 덕수궁에 이르는 정동길을 답사하며 격동의 역사를 느껴보자.

경교장. /사진=한국관광공사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던 거처 ‘경교장’
여정의 시작점인 경교장은 강북삼성병원 안에 있다.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출구로 나와 강북삼성병원으로 들어가자. 사적 제465호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공간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의 현장이다. 

서울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이자 백범 김구 선생이 서거한 역사적 현장인 경교장을 원형 복원하고 우리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을 되살려 시민들의 교육공간으로 활용하고자 경교장을 복원했다. 내부는 임시정부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전시공간으로 꾸몄다.


복원된 경교장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걸어온 길을 유물과 영상, 정보검색코너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러시아공사관 옛터. /사진=한국관광공사

◆아관파천의 아픔, 러시아공사관 옛터
경교장에서 나와 정동사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넌 뒤 정동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캐나다대사관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 조금만 들어가면 러시아공사관이다. 러시아공사관은 아관(俄館)이라 불리는데 우리에게는 고종의 아관파천 사건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을미사변으로 명성왕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한 후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고종은 경복궁에 유폐됐다. 이에 친러파 범진 등과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왕실보호를 내세우며 고종에게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옮기라고 종용했다. 1896년 2월1일 고종과 세자는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했다.


그 결과 친일 김홍집내각이 무너지고 친러 박정양내각이 조직되는 등 세력다툼이 벌어졌다. 이듬해 2월20일 고종이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하기까지의 1년을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고종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음식을 담당하던 엄상궁과 사랑에 빠졌는데 엄상궁이 나은 아이가 영친왕이다. 

러시아공사관은 조선말 한로수호조약이 비준된 1885년 직후에 착공, 1890년에 준공됐다. 르네상스식의 우아한 2층 벽돌집으로 러시아인 사바틴(Sabatine)이 설계했다. 공사관이 건립된 일대는 연산군이 도성 밖으로 놀러가기 편리하도록 설치한 3개의 마장 중 하나였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을 덕수궁 가까운 곳에 뒀다는 이야기도 있다. 

덕수궁 중명전. /사진=한국관광공사

◆을사늑약의 치욕, 덕수궁 중명전… 애국운동의 산실 ‘정신 여학당’
러시아공사관에서 뒤돌아 나와 다시 정동길을 따라 조금만 걸으면 덕수중 중명전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중명전은 덕수궁의 왕실 도서관으로 지어졌다가 고종의 편전으로 쓰이던 곳이다. 지금은 덕수궁 밖에 있지만 원래는 이곳도 덕수궁 안이었다.

1905년 이곳에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은 을사늑약이 맺어졌다. 그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곳도 중명전이었다. 하지만 특사는 실패하고 일제는 이를 빌미 삼아 고종을 퇴위시키고 말았다. 중명전은 현재 을사늑약과 헤이크 특사에 대한 자료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중명전 옆에는 예원학교가 있는데 이곳이 ‘정신 여학당’ 옛터다. ‘정동 여학당’으로도 불리는 정신 여학당은 1887년 미국 선교사이자 여의사였던 엘러스가 정동에 있는 제중원 사택에 설립한 학교다. 1939년 신사 참배 거부로 교장이 해직되고 재단이 해체됐다. 학교 내에서 조직된 애국 부인회는 1919년 3·1 운동에 여성들을 집결시켰고 1926년 6·10 만세운동에서는 30여명의 희생자를 냈다.

정동제일교회 /사진=한국관광공사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 ‘정동제일교회’
중명전으로 들어갔던 길을 따라 나오면 길 건너로 정동제일교회가 보인다. 정동교회는 우리나라에 개신교가 보급된 후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다.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1858~1902)는 우리나라에 입국한 뒤 배재학당을 세워 한국 근대교육의 터를 닦았다.

그는 학교에서 종교활동을 했지만 예배만을 위한 건물을 구입해 베델 예배당이라 하고 1887년 첫 예배를 시작했다.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 건립이 필요해지자 1895년 공사를 시작해 1897년 12월26일 봉헌식을 가졌다. 

이 건물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19세기 교회 건물로 구조는 단층이지만 층고가 높아 2층으로 보이고 남측 종각은 3층 높이로 지어졌다. 미국식의 단순화된 고딕양식으로 건립 당시의 사진을 보면 이웃한 기와집이나 덕수궁과 잘 어울린다. 이곳에서는 많은 토론회와 음악회 등이 열려 신문화 수용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했다. 

본래는 십자형이었으나 1926년 증축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서 현재는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원래 건물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손상이 없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기단은 조선시대 목조 건축의 솜씨가 배어있어 주목된다. 이 교회당의 종은 장식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소박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사진=한국관광공사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근대지식인의 요람 ‘배재학당’
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배재학당 터인 배재어린이공원과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나온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1916년에 세워져 교실로 사용된 배재학당 동관 건물을 그대로 살려 2008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역동적인 공간구성과 현대적인 감각을 살린 상설전시장과 매년 새로이 마련되는 기획전시 및 특강 프로그램들로 일반관람객들과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새로운 시각의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으로 초기부터 영어수업을 비롯한 전인교육을 실천했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과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지식인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이다.

◆답사 코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 - 경교장(강북삼성병원) – 정동 러시아공사관 옛터 – 덕수궁 중명전 - 정신 여학당 터(예원학교) – 정동제일교회 – 배재역사박물관·배재학당 터

자료 및 사진= 한국관광공사
참고문헌 = 장규식, ‘서울, 공간으로 본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