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료 납입방법별 비중(2017년1월~2019년6월 손보사 10곳 기준)./자료=금융위원회
#. A보험사 소속 설계사들이 가상계좌를 통해 무려 10억원(842건)에 달하는 보험료를 낸 것으로 파악됐다. 이 설계사들이 거액의 보험료를 낸 것은 자신이 계약한 보험상품 때문이 아니었다. 고객이 가입한 보험상품의 보험료를 대납해 본사로부터 계약유지 보너스를 받기 위함이었다.

보험설계사 보험료 대납문제가 심화되면서 금융당국이 결국 칼을 빼들었다. 금융감독원은 내년 상반기부터 보험 모집조직이 가상계좌를 부당 모집행위에 이용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설계사가 보험료를 대신 내주는 행위 자체를 금지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당국의 조치에 대해 ‘실효성이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가상계좌를 막는 것만으로 보험료 대납을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무리한 실적압박이 가해지는 영업환경을 뜯어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납 행위 금지, 실효성 있을까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보험법인대리점(GA)과 보험설계사가 계약자명으로 가상계좌에 보험료를 대납하는 행위를 내년 상반기부터 원천적으로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허위계약으로 거액의 신계약 수수료와 인센티브를 받는 설계사들의 부당 모집행위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해서다.


이를 위해 금융당국은 보험·은행업계와 관련 행위를 막는 전산시스템 공동구축에 나섰다. 보험료의 실제 입금자가 계약자와 동일한지 현재로써는 보험사가 확인하기 어려워서다. 실제 입금자가 누구인지 선별하겠다는 것이다. 보험계약자와 계좌주 이름이 다르면 은행에서 이를 인지하고 금융기관별로 정보를 공유하게 된다. 이후 실제 입금자가 보험모집인(설계사·GA)이면 처벌하겠다는 계획이다. 보험업법 제97조1항6호는 실제 명의인이 아닌 자의 보험계약 등 모집을 금지하고 있다.

보험료는 자동이체, 신용카드, 가상계좌, 실시간 계좌이체 등의 방법으로 납부할 수 있다. 이중 자동이체(78.5%)와 신용카드(12.4%) 비중이 압도적이다. 가상계좌를 통한 납입 비율은 5.8%로 매우 적은 편이다. 보험사 관계자는 “일반 보험가입자들은 대부분 계좌이체, 신용카드를 이용한다”며 “가상계좌는 보험료 수납편의성을 이유로 도입했는데 주로 신용도가 떨어져 신용카드가 없거나 정기적인 수입이 없는 가입자가 이용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금융당국은 가상계좌 납부비율이 6%에 불과하지만 이 비율안에 설계사 부당행위가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감원에 따르면 손해보험사 전체 장기보험계약 2년 유지율은 70.6%인데 가상계좌에 보험료가 6회 연속 납입된 경우 계약유지율은 34.0%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즉 설계사들이 가상계좌로 6개월간(6회) 보험료를 대납한 후 계약 인센티브를 받고 대부분 해지한다는 뜻이다.
설계사들이 보험료를 대납하는 이유도 바로 이 인센티브 때문이다. 보험 계약자는 이름만 빌려줘 가입하고 설계사는 수수료를 받을 목적으로 일정기간 보험료를 대납한다. 설계사들은 한달에 일정액 이상 계약을 체결하면 시상·프로모션 등도 받을 수 있어 부당계약 유혹에 더 쉽게 빠지고 있다.

하지만 보험영업채널에 종사하는 설계사나 지점장 등은 당국의 대책에 대해 실효성이 적을 것으로 본다. 설계사가 마음만 먹으면 다른 사람을 통해 보험료를 대납할 수 있어서다. 보험설계사 A씨는 “몸집이 큰 설계사는 아래 거느리는 직원만 수십명”이라며 “아는 지인을 통해 보험료를 대납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한 설계사가 계약자에게 직접 현금으로 보험료를 전달하는 방법도 있다. 심한 경우 설계사가 고객 통장을 지니고 비번까지 관리하며 보험료를 납부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국은 설계사가 다른 루트를 통해 보험료를 대납할 수 있는 것을 안다면서도 일단 행위를 금지시키면 효과가 나올 것으로 본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단 가상계좌를 통한 보험료 대납을 원천 차단하는 행위를 시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며 “설계사들의 대납행위를 지속적으로 방해하면 장기적으로 볼 때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영업 관행 개선이 우선

일부 설계사들은 이번 보험료 대납 금지에 대해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보험가입자들이 먼저 보험료 대납을 요구해오는 경우도 많다는 설명이다. 보험설계사 B씨는 “처음부터 ‘몇회까지 대납해주세요?’라고 물어보는 고객도 있다”며 “100만원 정도의 보험료는 기본으로 대납해준다고 생각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목적이어서 일단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또한 보험을 해지하고 싶을 때 보험설계사가 대납한 증거를 들이미는 가입자도 있다고 말했다. B씨는 “설계사가 무단으로 대납했다며 납입한 보험료를 돌려달라는 가입자도 있다”며 “인센티브 욕심에 보험료를 대납한 우리도 문제지만 가입자들도 악질이 많다”고 밝혔다.

보험료 대납을 막는 것보다 설계사에게 과도한 실적압박이 주어지는 현재의 영업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보험사 지점장들은 매일 본사로부터 실적압박에 시달린다. 결국 지점장도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이 보험료를 내면서까지 신계약을 체결하려 한다. 보험사는 당장 보험료 수익이 들어오지만 궁극적으로 해당 계약이 해지될 가능성이 높아 허위계약으로 인한 모집수수료 누수만 발생할 수 있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당국이 보험료 대납 행위에만 포커스를 뒀다”며 “정작 손질이 필요한 것은 부당모집을 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보험영업 관행이다. 보험사도 모집수수료 누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실적에 급급하다. 왜 설계사들이 보험료를 대납하는지에 대해 당국이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22호(2019년 12월10일~1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