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2월24일은 '삼전도의 굴욕'이 일어난 날이다. 사진은 삼전도비 동판. /사진=머니투데이(문화재청)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하지만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 수 없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다. 그러나 곧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했고 청 태종이 도착한 후엔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 20만 청나라 군이 집결해 성을 완전히 고립시켰다.
성내에는 군사 1만3000명이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기에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했다. 성내에서는 '죽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청과 싸우자'는 척화파(김상헌 등)와 '일단 싸움을 멈추고 청과 협상해 나라를 지키고 보자'는 주화파(최명길) 사이에 논쟁이 지속됐다.
항전 47일이 되는 날 왕족들이 대피한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청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청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은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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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궤구고두례를 행하다… 인조의 항복━
인조는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과 석촌동 부근에 있던 하중도의 나루터인 삼전도로 나갔다. 세자와 신하 500여명을 이끌고 나가 청 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례'(또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하고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 '삼궤구고두례'란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이다. 무릎 1번 꿇을 때마다 머리를 3번씩 조아려서 총 9번을 하는 것이다.청나라는 맹약에 따라 소현세자·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삼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를 잡아 2월15일 철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어 심양으로 방물과 세폐를 조공하고 청 황제의 책봉을 받아야 했다. 이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당한 것으로 외교권을 제한당한 것이었다.
조공책봉관계가 성립되면서 조선은 청의 연호와 책력을 채택해야만 했다. 인조는 숭덕 연호 채택에 적극적으로 임하면서 청 연호를 사용하지 않는 등 사대하기를 거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그들의 상소문을 접수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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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 치욕의 유적… 삼전도비가 세워지다 ━
삼전도비 전경. /사진=문화재청
그러나 인조부터가 자신의 굴욕이 쓰인 비석을 누구나 볼 수 있는 자리에 세운다는 것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비석을 세우는 일을 보류했다가 '크게 손해보지 않고 생색은 많이 낼 수 있으니 해버리자'는 김류의 청원에 마지못해 사업이 재개되기도 했다. 이로써 그해 8월16일부터 청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은 단을 개조하는 공사가 시작됐는데 홍수가 나면 침수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삼전도의 굴욕 당시보다 오히려 더 높고 크게 만들어야 했다.
다음해 4월1일까지 비석에 비각을 씌우는 공사가 완료되면서 삼전도비를 세우는 모든 공사가 마침내 마무리됐다. 이로써 삼전도의 굴욕에서 장장 3년 2개월이 걸린 모든 공정이 끝났다. 청 태종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거대한 비석이 들어서서 조선인들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영원히 상기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후 삼전도비는 허술한 관리 속에 위치가 변경되기도 했다. 강물 바로 옆에 위치할 땐 여러 차례 침식되기도 했다. 2007년 철거를 주장하는 범인에 의해 스프레이로 훼손되는 사건도 겪었다. 결국 해당 사건 이후에야 송파구에서 원래 위치 고증에 나섰다.
여러 작업을 진행한 끝에 2010년 현 위치인 석촌호수공원 서호 언덕으로 이전했다. 치욕적인 역사의 상징이자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 서울 삼전도비는 서울 한복판에 위치했지만 묘하게 오르막과 나무로 살짝 숨겨진 듯한 위치에 있어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거의 볼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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