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 취임 당시 하나회 내부에서는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자신들을 쉽사리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오판이 대다수를 이뤘다. 사진은 12.12 군사반란을 모티브로 영화 '서울의 봄' 촬영 스틸 컷.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인스타그램
1993년 3월8일. 김영삼 대통령이 군의 요직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완수 국군 기무사령관을 경질하면서 본격적인 하나회 숙청에 돌입했다.
하나회는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씨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을 필두로 조직된 육군 내 사조직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도움으로 은밀히 성장한 하나회는 어느덧 정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전씨는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공백이 생긴 국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이후 12월12일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 전체를 장악했고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92년 12월18일 민간인 출신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가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문민정부가 출범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던 군 출신 대통령의 계보를 약 30년 만에 끊어낸 것이다.
김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군사정권을 이끌던 하나회 출신 집단이 정치권 내에서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는 걸 보고 이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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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내 잘못된 점 바로 잡겠다"… 국방분과위원 경력 활용한 YS의 전략━
1993년 3월8일 김영삼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 내 불법 사조직 하나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진행된 제14대 대통령 취임식. /사진=뉴시스
이때까지만 해도 하나회 내부에서는 김 대통령이 군인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군 조직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이뤘다. 또 김 대통령이 하나회를 배후로 둔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만큼 자신들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며 방심했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김 대통령은 군사정권 동안 국방분과위원으로 근무하면서 군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하나회 숙청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을 지연할 경우 전두환계와 노태우계로 다소 분열됐던 하나회가 담합해 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4월2일 안병호 수도방위사령관과 김형선 특전사령관마저 경질했다.
같은날 하나회 명단이 적힌 문서가 세상에 공개됐다. 명단에는 현역 중장급인 육사 20기부터 중령급 36기까지 140여명이 포함됐다. 당시 하나회의 존재를 알고 있던 비하나회 장교들은 여전히 하나회가 군 내부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존재를 몰랐던 장교들은 군 내 불법 사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비판하며 즉각 추방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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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은 해임, 영관 이하는 좌천… 뿌리까지 뽑힌 하나회━
김영삼 전 대통령은 훗날 하나회 숙청에 대해 민주주의를 위한 필수적인 과제였다고 밝혔다. 사진은 1986년 김 전 대통령이 군산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며 연설하는 모습. /사진=뉴시스(독자 제공)
김 대통령은 군 내 깊게 박힌 하나회 뿌리를 제거하기 위해 영관·위관급까지 범위를 확대하면서 대령·준장 진급 심사에서 하나회 출신 장교들을 전원 탈락시켰다. 그의 숙청작업은 1994년까지 계속됐고 도합 군단장급 62%, 사단장급 39%를 교체했다. 새로운 장성급 인사가 몰린 탓에 취임식에서 달아줄 계급장이 부족했을 정도였다.
30년 동안 군사 정권 아래 피해를 본 국민들은 하나회 숙청에 묵은 체증이 내려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훗날 김 대통령은 SBS와의 인터뷰에서 하나회 숙청에 대해 "하나회는 대통령을 두고 자신들 마음대로 정권을 잡고 있었다"며 "그들을 척결하기 전까지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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