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법 하위 법령 제정이 본격화되면서, 간호계 일각에서는 진료지원업무를 전문간호사가 전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언뜻 제도적 이상을 지향하는 듯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의료 현장의 현실을 외면한 채 이론적 당위만을 앞세운 접근에 불과하다. 법과 제도는 이상 이전에 현실 위에 세워져야 한다. 현실을 무시한 법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며, 오히려 환자 안전을 해칠 수 있다.
현재 간호법 제정에 따라 간호사가 진료지원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병원급 의료기관은 전국에 3200여 개소에 달한다. 보건복지부가 지난 2월, '간호사 업무 관련 시범사업'에 참여한 약 200개 의료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진료지원업무를 수행하는 간호사는 무려 1만 7560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시범사업 참여 기관만을 대상으로 한 수치다. 나머지 3000여 개 병원에서는 파악조차 되지 않은 채 수많은 간호사가 진료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의사의 지시에 따라 검사 및 약물 처방 입력, 수술 중 견인 및 수술 부위 소독, 수술·마취 기록 등 민감하고 전문적인 의료 행위를 수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지위와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의사의 그림자'로 존재하고 있다. 적절한 교육조차 받지 못한 채, 의사 아이디로 시스템에 접근하는 등 위법 논란의 여지도 안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현실을 외면한 채 진료지원업무를 오직 전문간호사에게만 맡기자는 주장은 타당한가?
최근 5년간 11개 전문간호사 분야(2개 분야 미배출)의 연평균 배출 인원은 400여 명에 불과하다. 현재 전문간호사에게 진료지원업무를 전담하게 하는 의료기관은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간호사 제도는 본래 복잡하고 중증의 질병을 가진 환자에게 고도의 전문 간호를 제공하기 위한 석사급 자격제도이다. 진료지원업무만을 수행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다.
그럼에도 일부 간호계 내부에서 전문간호사를 중심으로 진료지원 체계를 구성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제도의 본래 취지를 왜곡하는 것이며, 전문간호사 수급 현실을 외면한 비현실적 해법일 뿐이다.
해외 사례는 어떨까. 일본은 2015년 '인정간호사(Certified Nurse)' 제도를 도입해, 일정 교육과 자격시험을 통과한 간호사에게 의사의 포괄적 지시하에 38개 특수행위를 수행할 수 있도록 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이는 간호사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고, 환자의 안전을 제고하며, 보건의료 체계의 효율성을 높인 합리적인 제도이다. 미국 등 선진국들 역시 유사한 제도를 통해 간호사의 역할과 책임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안고 있다.
전문간호사 제도가 고도의 전문 간호 인력을 양성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의료 현장에서 진료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수만 명의 간호사를 배제한 채, 오직 전문간호사만이 해당 업무를 맡아야 한다는 주장은 현실을 외면한 처사이며, 환자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제도적 공백은 간호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료지원업무의 법적 책임이 명확하지 않은 지금의 구조는 간호사를 불법 의료행위의 위험에 노출하고 있으며, 환자 역시 안전하고 일관된 진료를 받을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게 한다. 간호법은 이러한 오랜 제도적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하위 법령은 이러한 입법 취지를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의료 현장에서 진료지원업무를 실제 수행 중인 간호사들을 제도권으로 편입시켜야 한다. 일정한 교육과 자격 심사를 거쳐, 전문간호사와 함께 진료지원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그들의 업무 범위와 법적 책임을 명확히 규정해야 한다. 이는 간호사의 권익 보호를 넘어서 환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다.
간호계 내부의 직역 다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자가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받고 있는가"라는 현실에 기반한 제도 설계다. '전문간호사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를 제때, 안전하게 제공할 수 있느냐'가 핵심이다.
간호법은 환자 안전을 위한 법이다. 그 법이 현장의 간호사들을 외면한다면, 결국 제 역할을 할 수 없다. 일본 등 여러 나라가 간호의 현실을 반영한 제도적 결단을 내린 것처럼, 이제 우리도 더 이상 늦춰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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