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호제 셰프

(서울=뉴스1) 전호제 셰프 = 뉴욕의 조리도구 상점에 가면 항상 사고 싶은 것들로 가득했다. 계란 끝을 자르는 가위, 체리 씨를 깔끔하게 빼는 도구, 닭을 자르는 데 쓰는 칼 등 하나의 목적에 충실한 용품들이 즐비했다.

각종 도구를 보면 그것을 샀을 당시의 내 마음이 떠오른다. 대부분은 부족한 실력을 보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라인에서 인정받고, 더 빨리 나아가고 싶었다.


내가 숟가락을 모으기 시작한 계기도 다르지 않았다. 서양 요리에서는 럭비공처럼 둥글게 모양을 잡는 것을 퀜넬(quenelle)이라 부른다. 두 개의 스푼을 마주 보게 해 교대로 한 면씩 다듬으며 만드는 방식이다. 처음 산 숟가락도 예쁜 퀜넬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예쁜 모양을 만드는 디저트 라인에서 아이스크림을 낼 때는 따뜻한 물에 담긴 숟가락 한 개로 타원형의 입체 모양을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만들었다. 그렇게 한 분야씩 더 좋은 결과물을 내기 위해 숟가락 수는 점점 늘어갔다.

수란을 건질 때는 물이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소스를 접시에 올릴 때는 약간 작은 것이 좋고, 녹인 버터를 스테이크나 생선 위에 덮어 익힐 땐 커다란 것이 좋았다.


이처럼 완벽한 숟가락에 대한 집념으로 요리사를 위한 숟가락을 만든 셰프가 있었다. 그는 적당한 곡선과 크기로 고기나 생선을 굽는 라인에서 유용한 숟가락을 만들었다. 바로 뉴욕과 싱가포르의 레스토랑 셰프이자 요리책 저자인 그레이 쿤즈(Gray Kunz)였다.

숟가락에 담긴 쿤즈 셰프의 넉넉한 마음

그는 뉴욕 시내의 유명한 조리도구 판매업체인 제이비 프린스(JB Prince)와의 협업해 자신의 이름을 건 숟가락을 내놓았다. 이 제품은 라인 쿡 사이에서 인기 아이템이었다. 하루 일을 마친 직원들이 쿤즈 스푼을 잃어버려 주방 이곳저곳을 뒤지고 다닐 정도였다.

쿤즈 셰프는 2004년 싱가포르에서 뉴욕으로 돌아와 '카페 그레이'를 열었다. 개업 직후 주방 직원들에게 쿤즈 스푼에 직접 직원 이름을 새겨 두 개씩 나눠 주었다고 한다.

2008년 무렵, 나는 몇 달 후면 미국 비자가 만료돼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의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어 하루라도 스타지에를 경험하고 싶다고 부탁했다. 일을 마치고 인사를 할 기회도 얻었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그의 요리책을 보고 요리를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고 직접 뵙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왜 그런지 쿤즈 셰프는 이런 칭송의 말에 손사래를 쳤다.

가방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는 갑자기 수셰프에게 내게 생선요리를 정식으로 만들어 주라고 했다. 수셰프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들썩였지만, 나는 햇빛이 환하게 드는 커다란 테이블에서 코코넛 소스를 곁들인 할리벗(흰살 생선의 일종)을 맛볼 수 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2020년 어느 날, 한국에서 그의 부고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문득 울컥한 느낌이 들었고, 가방에서 그의 스푼을 찾아보았다.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가득한, 두 개의 쿤즈 스푼이 있었다.

그가 관여했던 레스토랑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스푼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팔리고 있고, 작은 디저트용 버전도 새로 나왔다.

더군다나 올해 3월 뉴욕타임스에서 그의 스푼을 재조명한 기사가 나오면서 이 숟가락은 이제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 되었다. 나처럼 쿤즈 스푼을 손에 쥐고 일했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나누었던 스푼에는, 보이지 않은 그의 넉넉한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