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는 지루했다. 예전의 한국 축구 같았다. 빌드업만 이어졌고, 유효슛은 없었다. 중원에서 공을 돌리다 이렇다 할 순간 없이 연장으로 가는, 선수보다 해설자가 더 바쁜 그런 경기 말이다. 설명은 설명을 불렀고, 알 듯하면 잊혔다. 회의의 목적조차 흐려져 갔다. 한 시간이 지나면 습득한 정보의 거의 절반이 사라진다는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을 실증하는 자리 같았다.

우리는 수많은 회의에 둘러싸여 산다. 회의가 곧 일이다. 회의를 많이 하면 회의적(懷疑的)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회의의 대부분은 설명하는 자리다. 설명으로는 실행은커녕 공감조차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리는 설명을 요구받아 왔다. 질문엔 정답이 있다는 전제, 논리에는 정석이 있다는 믿음에 길들여졌다. '수학의 정석'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그러나 정석은 정답을 설명하는 책이다. 남이 짠 공식을 따르는 기술이지, 나만의 길을 찾는 방법이 아니다. 남의 문을 여는 열쇠일 수는 있어도, 나의 문을 여는 지도는 되지 못한다.

설명과 설득은 다르다. 설명은 원인과 결과를 직선으로 잇는다. 효율적일 수는 있지만 오래 남지 않는, 선생의 방식이다. 설득은 곡선이다. 내러티브를 던지고, 청자가 따라오게 만든다. 효과적이다. 처음엔 느려도 한 번 마음을 얻으면 오래 가는, 동료의 방식이다.

설명은 잘해야 본전이지만 설득은 잘하면 대박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강한 기업은 설명하지 않는다. 고객을, 그리고 스스로를 설득해 간다. 아마존이 그렇다. 이 회사는 이름 자체가 신조어가 된 보기 드문 기업이다. 소비자의 습관만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를 통째로 바꿔놓았다. 물론 기업에 좋은 일이 세상 모두에게 좋은 일은 아닐 수 있다.


아마존 관련 책도 많다. 내 서가에 꽂힌 것만 해도 열 권 가까이 된다. 공룡, 초토화 같은 자극적 표현이 표지에, 띠지를 덮는다. 승자독식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하는 '기업판 아마존의 눈물' 다큐멘터리 같다. 하지만 드물게, 이 거대한 조직의 '일하는 방식'에 집중한 책도 있다.

'순서파괴(Working Backwards)'가 그렇다. 창업자 제프 베조스와 함께했던 콜린 브라이어와 빌 카가, 제목 그대로 '거꾸로 일하는 방식'을 소개한다. 나는 그 방식에서 아마존의 지속성장을 이끈 에너지, 설득의 힘이 만들어진다고 본다.

아마존은 파워포인트(PPT)를 금지한다. 대신 여섯 페이지짜리 보도자료 형식의 내러티브 문서를 쓴다. 회의는 발표자가 설명하는 대신, 모두가 이 문서를 조용히 읽으며 시작된다. 그리고 질문이 오간다. 발표 → 질문 → 결론이 아니라, 결론 ⤳ 이야기 ⤻ 질문의 순서다. 설명의 직선이 아니라, 설득의 곡선을 따른다.

말은 흐르지만, 글은 남는다. 말보다 글을 쓸 때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믿는지,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야기, 내러티브가 만들어진다. 나는 투자유치(IR)나 프로젝트 계획을 만들 땐 숫자나 그림을 찾기에 훨씬 앞서 스토리를 쓴다. 이 스토리가 그럴듯하면 근거를 붙이고, 아니라면 버린다.

설득의 곡선은 거대한 조직에서도, 개인의 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프란츠 카프카의「법 앞에서」라는 짧은 소설이 있다. 소설에서 법은 하나의 건축물로 그려지는데, 종교적으로는 구원과 영생을, 사회적으로는 자유와 해방 등을 상징한다.

한 시골 사람이 법을 찾아 먼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안 된다"며 문을 막는다. 그는 묻지 않고 기다린다, 평생을. 죽음이 다가오자, 그는 문지기에게 묻는다. "모두가 법에 들어가려 하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았죠?" 문지기는 말한다. "이 문은 자네만을 위한 문이었지." 그 문은 결국 열리지 않는다.

설명에 길들여진 사람은 자신을 설득하지 못한다. 정답을 좇는 정석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문을 열고(문이 열리고),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에 부딪히면 거꾸로 읽는다. 결과에서 시작해 원인과 행위 사이에 어떤 이야기의 곡선이 필요한지를 상상하며 써내려 간다. 그렇게 하면 나부터 설득할 수 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하면, 남은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김영태 아케이드 프로젝트 대표



김영태
은행원, 신문기자와 방송기자, 벤처 창업가, 대기업 임원과 CEO, 공무원 등을 지냈다. 새로운 언어와 생태계를 만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을 쓰며 방향을 찾았다. 경영혁신과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경험과 성과를 쌓았다. 현재 컨설팅회사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설립, 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