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야구장은 일제강점기부터 한자리를 지켜오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역사적인 장소다. 한때 조선시대 군사들의 훈련장이었던 이곳은 1905년 국내 최초로 야구 경기가 열린 장소다. 1925년 해당 부지엔 경성운동장이 완공되면서 야구장의 모습을 갖췄다. 당시 이름은 경성야구장이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영민이 경성야구장에서 처음으로 홈런을 날렸다. 1958년부터 고교 야구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은 바로 이영민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경성야구장은 한국 야구의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정부는 1958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를 유치한 후 대회를 열기 위해 1956년부터 확장 공사를 시작했다. 결국 공사는 예산 문제로 대회 개막 이전까지 완공되지 못하면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유치는 무산됐다. 1959년 준공된 후 이곳은 우리가 흔히 아는 현대 야구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당시 이름은 서울운동장이었다.
완공 후 서울운동장은 아마추어 야구의 중심지가 됐다. 고교야구 4대 대회(대통령배, 청룡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를 비롯해 실업대회 및 대학야구는 물론 대학부 이상이 모두 출전하는 백호기까지 모두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당시 아마추어 야구는 전성시대를 맞았고 표를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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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프로야구 출범… 동대문야구장의 몰락━
MBC가 지금의 잠실야구장으로 홈구장을 이전한 후 동대문야구장은 아마추어 전용 야구장이 됐다. 1985년 OB 베어스(현 두산 베어스)가 이곳을 잠시 홈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나 마찬가지로 잠실로 이전했다.
프로야구 출범은 아마추어 야구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실업 야구와 고교야구의 인기는 시들어갔다. 결국 수익이 전혀 나지 않았던 동대문야구장은 서울시의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서울시의회는 동대문야구장 부지로 시청사를 이전하는 방안도 논의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가 도래하며 이 계획도 무산됐다.
야구장과 함께 만들어진 축구장 동대문운동장도 1996년부터 사용을 멈췄다. 프로축구단 일화 천마(현 성남FC), LG치타스(FC서울), 유공 코끼리(제주SK FC)는 각각 경기 성남, 안양, 부천으로 연고지를 옮겼다. 급기야 2002년 당선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동대문운동장을 개조해 주차장으로 활용하기에 이르렀다. 동대문야구장도 서서히 재개발이 필요한 지역으로 거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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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야구장, 추억 속으로 사라지다━
2006년 10월 서울시는 동대문야구장 철거를 확정했다. 결국 동대문야구장은 2007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DDP는 2014년 개관 후 서울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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