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12일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다. 사진은 1981년 12월8일 영산강하구언 준공식에 참석한 전두환과 아내 이순자씨. /사진=뉴스1(대한뉴스 제1362호)
1979년 12월12일, 당시 신군부 세력이었던 전두환·노태우 등이 이끌던 군 내 사조직 '하나회'가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군 내부의 인사 충돌이 아니었다. 유신 붕괴로 생겨난 권력 공백을 틈타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국가 권력을 장악한 명백한 쿠데타가 바로 '12·12 군사반란'이다. 46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건은 한국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10·26 이후의 공백, 다시 요동한 군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자 최규하 대통령은 전국(제주 제외)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정승화는 윤성민 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 기존 지휘라인을 재정비하며 군을 안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미 군 내부에는 균열이 깊었다. 육사 11기 중심의 하나회는 비공식 파벌로 세력을 넓혔고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0·26 수사를 맡은 합동수사본부장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은 정승화 총장이 '수사 비협조·김재규 연루'라는 명분을 들며 연행 계획을 밀어붙였고 결국 12월12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하나회 단체 사진. /사진= 영화 '서울의 봄' 캡처
총성이 한밤중을 찢다
12월12일 저녁,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병력 50~65명은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난입했다. 총성이 오갔고, 정승화 총장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그 시각 반란군은 잠재적 저항 세력도 동시에 제거하고 있었다. 진압군 병력 출동을 추진했던 육군수뇌부(윤성민 참모차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는 잇따라 서빙고 분실로 불법 연행됐다.


군 지휘체계는 순식간에 붕괴했다. 이 모든 과정은 최규하 대통령의 사전 재가 없이 벌어진 불법 군사행동이었다. 신군부는 뒤늦게 재가를 얻으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노재현 국방장관을 연행해 대통령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사후 승인 시도를 이어갔다.
새벽의 점령, 쿠데타의 완성
결국 최규하 대통령은 13일 새벽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했다. 이때 국가는 이미 반란군 손에 넘어가 있었다. 보안사는 통신망을 장악했고, 하나회는 특전사·수도경비사·대통령 경호실 등 핵심 부대를 점령했다. 노태우 9사단장과 정호용 50사단장은 각각 수경사령관과 특정사령관에 취임하며 군 지휘부는 완전히 신군부로 넘어갔다.

전두환은 잠정적 승인을 얻는 형식으로 사건을 합법화하려 했고 이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과 대통령 취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됐다.

정승화 총장은 이등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예편했다. 하지만 문민정부 시절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진. /사진=5 18 민주화운동부상자회
뒤늦은 법적 단죄
1997년 대법원은 12·12 사태를 '군사반란'으로 규정하며 전두환에게 무기징역과 벌금 2205억원, 노태우에게 징역 17년과 벌금 2628억9600만원 추징을 각각 선고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특별사면으로 형 집행이 면제되고 석방됐다.
2023년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은 이 사건을 다시 국민 앞에 소환했다. 2024년 청룡영화상 작품상 수상과 함께 신군부에 맞서 끝까지 벙커를 지키다 숨진 고 정선엽 병장의 희생도 새로이 조명됐다.


12·12 군사반란은 단순한 군 내부의 권력 충돌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계를 정면으로 뒤흔든 사건이다. 그날의 총성과 혼란, 그리고 피로 쌓여 있던 군화 소리는 대한민국 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