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리포트]④상속세 무서워 은퇴 못해… '그림의 떡' 가업상속공제
[표류하는 상속세 개혁, '장수기업' 꿈 막는다] 100년 기업 16곳뿐… '상속세 장벽'에 끊기는 기업의 맥
김성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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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최고세율 60%. 대주주 상속 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율을 적용하는 나라가 한국이다. '100년 기업'의 필요성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현실의 상속세 제도 앞에서 가업 승계는 번번이 가로막힌다. 올해도 상속세 개편 논의가 정치권과 경제계를 중심으로 거세게 일었지만 부자 감세 논쟁과 정치적 부담에 부딪혀 끝내 좌초했다. 한국 상속세가 왜 고율로 굳어졌는지 역사적·사회적 배경을 짚어보고 가업 승계와 경제 활력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살펴본다. 이를 바탕으로 100년 기업을 가로막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이끌 수 있는 상속세 개혁의 방향을 모색해본다.
한국에서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은 지난해 기준 16곳에 그친다. 일본(4만5284개), 미국(2만1822개), 독일(5290개) 등과 비교하면 '장수기업의 토양'이 얼마나 빈약한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경영계에서는 "안정적인 기업 승계야말로 장수기업을 키우는, 지속가능한 경제를 떠받치는 인프라"라며 새 정부에 가업승계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있다.
빠르게 늙어가는 오너… 흑자 기업이라도 문 닫는다
국내 기업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중견기업에서는 오너의 고령화가 위험 요인으로 부상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중소기업 최고경영자(CEO)의 평균 연령은 55세다. 연령별로는 50대가 42.1%로 가장 많고 60대(29.1%)와 70대 이상(4.4%)도 합치면 30%를 훌쩍 넘는다. 60세 이상 CEO 비율은 2013년 15.9%에서 2023년 36.8%로 10년 새 두배 이상 뛰었다.
문제는 다음 세대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70세 이상 중소기업 CEO 약 245만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127만명은 아직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너가 고령인 데다 승계 설계조차 못한 상황에서 상속세 부담까지 겹치면 흑자를 내는 탄탄한 기업도 '차라리 문을 닫거나 파는 게 낫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게 현장의 호소다.
기업들이 꼽는 최대 경영 리스크는 단연 세금이다. 중견기업의 89.4%는 현행 상속·증여세 최고세율이 "높다"고 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서도 응답 기업의 65.3%가 가업 승계의 가장 큰 걸림돌로 '세 부담'을 지목했다. 현행 상속세 제도는 과세표준 30억원 초과 구간에 최고세율 50%를 적용한다. 상속세율만 놓고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일본(55%)에 이어 두번째로 높다. 여기에 최대주주 지분에 적용되는 '경영권 프리미엄' 할증까지 감안하면 실효세율은 최대 60%에 달해 세계 1위다.
가업상속공제, "그림의 떡"… 5년간 고용·업종 못 바꾸는 기업들
정부는 과도한 상속세 부담으로 인한 가업 포기를 막기 위해 가업상속공제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그림의 떡'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 제도는 피상속인이 10년 이상 영위한 중소·중견기업을 상속인이 승계할 경우 매출 5000억원 미만 기업을 대상으로 최대 600억원까지 상속재산에서 공제해 주는 제도다.
가장 큰 이유로는 엄격한 사후 관리 요건이 꼽힌다. 현행 가업상속공제 제도는 상속 이후 5년 동안 일정 비율 이상의 고용을 유지하고(통상 90% 수준), 주된 업종과 자산 구조(가업용 자산 40% 이상)를 그대로 지키도록 요구한다. 조금만 고용을 줄이거나 사업 구조를 바꿔도 공제받았던 세금을 추징당할 수 있어 경기 변동성이 크고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이 잦은 중소·중견기업 입장에선 현실적으로 맞추기 어렵다.
적용 대상이 제한적인 것도 제도 활용을 가로막는 요인이다. 가업상속공제는 매출 5000억원 미만 기업만 대상이어서 상장 대기업은 물론 상당수 중견기업이 혜택에서 제외된다. 기업 규모에 제한을 두지 않고 가업 승계를 폭넓게 지원하는 독일은 가업상속공제 활용 건수(2017~2022년)가 연평균 1만434건에 달하고 공제 금액은 138억8000만유로(약 24조원)에 이른다. 같은 기간 한국의 가업상속공제 활용은 105건, 공제 금액은 2983억원에 그친 것으로 집계됐다.
박양균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정책본부장은 "융·복합이 일상화된 산업 환경과 치열해진 글로벌 경쟁 속에서 기업들은 사업 전환과 구조 재편에 보다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며 "이러한 경영 여건을 반영해 기업이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살아남는 것만으로도 일자리 창출 등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충분하다"고 덧붙였다.
4만개가 넘는 100년 기업을 보유한 일본은 일찌감치 이러한 기업의 우려를 받아들였다. 2009년 사업승계 세제의 '일반조치'를 도입하고 2018년에는 한층 강화된 '특례조치'를 마련했다. 일반조치에 따라 가업을 승계한 후계자는 상속세의 3분의2에 대해 납부를 유예받을 수 있다. 특례조치는 더욱 과감한 세제 완화책으로 상속세 전액의 납부를 사실상 무기한 연기할 수 있도록 했다. 납부해야 할 세액은 상속 시점을 기준으로 확정된다. 기업 승계 과정에서 상속세 납부를 위한 저리 정책금융 지원도 제공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상속세 부담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기업의 선택지는 결국 ▲국내 기업의 사모펀드(PEF)로의 매각 ▲해외 이전 ▲적대적 인수·합병(M&A) 노출 확대 등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 가업상속공제 제도 개편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가업상속공제 적용 대상 업종을 현행 '포지티브' 방식에서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제언도 제기된다. 포지티브 방식이 법이나 제도에 명시된 업종만 허용하는 구조라면 네거티브 방식은 특별히 금지한 업종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모두 허용하는 방식으로 급변하는 산업 환경을 보다 유연하게 반영할 수 있다는 평가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중견·중소기업들은 어떻게 회사를 다음 세대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를 가장 큰 과제로 고민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기업의 평균 업력이 약 10년에 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높은 상속세 부담은 장수기업이 성장하고 축적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업 승계는 단순한 상속 문제가 아니라 기업 경영의 연속성과 직결된 사안"이라며 "기업이 지속적으로 가업을 이어가는 데 과도한 제한을 둘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업종 등을 열거하는 포지티브 방식보다는 원칙적으로 허용하되 일부만 제한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제도를 전환해 보다 유연하게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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