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벌써 33회를 맞는 법정기념일이다. 해를 거듭할수록 장애인의 사회참여는 점차 늘고 있다. 일례로 17대 이후 국회에 입성한 장애인 의원이 9명이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특히 장애인의 통행권이나 시설이용권리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사장되기 일쑤다. 설령 장애인 보행시설물을 설치했다 하더라도 관리 미흡으로 사용하기 어려워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부는 '장애물 없는 생활환경(Barrier Free)인증'(이하 BF인증)을 통해 이를 장려하고 있지만 강제조항이나 인센티브가 없어 민간시설물의 인증은 손에 꼽힐 정도다. 건설업체 중에서는 대림산업이 BF인증에 가장 적극적이다. 민간이 지어 본인증을 받은 아파트는 e편한세상 두곳이 유이할 정도다. 바로 LH공사가 인증한 원당e편한세상과 한국장애인개발원이 인증한 청구e편한세상(신당 제7주택재개발아파트)이다.
이 두곳의 인증을 현장에서 주도한 김인순 한국장애인개발원 정책연구실장과 함께 장애인 우수시설이 다른 시설물과 어떻게 다른지 확인해봤다.
김인순 실장이 휘트니스센터의 우회 경사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사진_류승희 기자).
◆문턱 없거나 완만한 경사로 필수
"이쪽에 계단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옆에 완만한 경사로를 설치해 놓은 곳은 흔치 않아요. 바닥 좀 보세요. 물에 젖더라도 잘 미끄러지지 않는 재질로 깔아놨어요."
김 실장은 지상에서 대여섯 계단 아래에 위치한 단지내 피트니스센터 진입로를 가리키며 이같이 설명했다. 12분의 1의 경사로를 택한 탓에 어림짐작으로 4~5평 정도의 공간이 더 들어갔다. 12분의 1 경사로는 높이가 1일 때 길이가 12인 경사를 뜻하는 의미로, 휠체어 이용자가 자력으로 오르내릴 수 있는 최소한의 경사도다. '공간=돈'인 아파트 설계과정에서 이 같은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였다.
이 아파트의 생활시설에 대한 진입경로를 살펴보니 바퀴가 있는 물체의 이동이 어디서나 가능한 구조다. 반대쪽 주차장에서의 진입은 더 수월하다. 문턱조차 없다. 실내에 위치한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은 차에서 내리면 곧바로 피트니스센터로 진입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깝다. 입구까지 성인걸음으로 다섯발자국이면 충분하다.
"각 동마다 장애인 전용주차구역을 다른 차의 간섭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어요. 이쪽도 마찬가지로 계단이나 문턱이 없고 제일 가까운 곳에 주차시설이 있어요. 엘리베이터도 곧장 이용할 수 있고요."
피트니스센터 안내데스크의 상담창구는 2개다. 하나는 서서 상담서류를 작성할 수 있는 높이, 또 다른 하나는 휠체어를 탄 사람이 이용하기 수월한 높이다. 장애인이 안내데스크에서 상담받을 때 느꼈을 참담함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생각해내지 못했을 디자인이다.
112동 단지 입구 앞으로 가자 역시 12분의 1 경사로가 계단과 함께 배치돼 있었다. 'ㄷ'자 모양으로 이동거리를 줄여놓았다. 반면 110동 단지 입구는 문턱조차 없이 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구조였다. 동별로 계단과 우회 경사로를 만든 경우와 직접 진입이 가능한 스타일로 나뉘었다.
"이 아파트 단지가 BF인증 최우수 등급을 받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장애 유무에 관계없이 동선에 차이가 없도록 만들어야 높은 평가를 받아요."
이 아파트는 평가점수 80점 이상을 받아 '우수' 등급을 받았다. 90점 이상인 '최우수' 등급을 받은 아파트에 비해 경사로나 계단이 많아서다. 장애인을 얼마나 배려하느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장애시설물이 있다는 것을 이용자들이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만드는 것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게 김 실장의 설명이다.
완만한 경사로가 있음에도 오른쪽으로 단층짜리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사진_류승희 기자).
주출입구 옆 18분의 1 진입로에는 돌기둥으로 박혀있어 휠체어 통행이 불가능했다(사진_류승
◆돈 들여 만들었는데… 이용실태 아쉬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지가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민간건설사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면서 장애인의 동선을 챙겼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서울 내 아파트 단지가 평지가 아닌 경사로에 지어지잖아요. 단지를 조성하다보면 지대가 높은 곳이 생기는데, 이곳은 시공사인 대림산업이 별도의 비용을 들여 엘리베이터 두곳을 추가했어요. 그 부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죠."
단지 중앙부를 통과해 후면쪽으로 통하는 길은 휠체어를 끌고 오르기에도 어렵지 않은 완만한 경사로가 있지만 1개층 높이만 운행하는 엘리베이터를 옆에 또 하나 뒀다. 장애인이 이용하기에 경사도가 높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단지 끄트머리에도 약 10m 정도의 표고차를 고려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계단만 설치해도 건축허가를 받는데 지장이 없던 곳이다.
"엘리베이터 한기당 1억원 정도 든다고 해요. 건설사는 BF인증을 받기 위해 이 단지에서 들이지 않아도 될 돈을 들였을 겁니다. 하지만 좋은 브랜드 이미지를 얻었으니 충분히 성공한 것 아닌가요?"
단지 주출입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통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경사로라는 18분의 1 진입로가 있는 곳이라며 김 실장이 여러차례 칭찬한 시설물이다.
현장에 도착하자 김 실장의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경사로 입구에 차량진입을 막는 돌기둥 세개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휠체어는 커녕 자전거 한대도 지나가지 못할 듯했다. 아이들의 놀이터로 변질될 것을 우려한 관리사무실의 조치로 보였다.
아무리 장애인에게 유용한 시설물을 만들었어도 활용 주체에 따라 가치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몇번 사용하다 빨래걸이로 전락한 런닝머신이 떠올랐다. 친절하게 휠체어 출입구라고 쓰인 안내표지판이 무색하게 느껴졌다.
■BF인증이란?
BF인증제도는 2007년 노약자 및 장애인도 일반인처럼 도로, 공원, 건축물 등에 접근하고 이용하는 데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현재 인증주체는 국토교통부 산하 LH공사와 보건복지부 산하 한국장애인개발원(이하 개발원)으로 나뉜다. 각 기관의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LH 인증건수는 92건, 개발원의 인증건수는 198건이다.
이중 현재 건물이 지어져 본인증을 받은 건수는 불과 LH 7건, 개발원 46건 뿐이다. 예비인증제를 두는 이유는 설계단계부터 보행약자를 위한 시설물 설치를 장려하기 위해서다. 예비인증을 받은 건축물은 완공된 시점에서 또 한번의 평가기준을 넘어야 본인증을 받을 수 있다.
인증심사기준에 따라 최우수·우수·일반 등급으로 나뉜다. 최근 BF인증을 받는 시설물에 대해 용적률 상향이나 지방세 면제 등의 인센티브 부여를 고려하고 있지만 아직 입법준비 단계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현재 인천시와 전라남도 등에서 인증수수료 인하·면제 혜택을 주고 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7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재테크 경제주간지’ 머니S,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