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더위가 찾아왔다고 다들 호들갑이다. 그러나 어둠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까워 오고 더위가 극성기에 다다르면 가을은 그리 멀지 않았다.
자연은 이처럼 한 시도 쉬지 않고 움직인다. 우리네 삶도 바닥으로 가라앉을수록 위로 떠오를 일만 남은 것이다. 이것이 주역의 정신이다.

<자강갈비> 박재원 대표는 어느 순간 연속적인 사업 실패로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다. 얼떨결에 고깃집을 차렸지만 실존을 고민할 정도로 부진했다.


고통스러운 시련의 날들에도 박 대표는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결국 겨울이 가고 그에게 다시 봄이 왔다.

물론 봄이 혼자 저절로 와준 것은 아니다. 봄 향기에는 그의 몸부림이 진하게 묻어있다.

◇ 고급 맥줏집 등 여러 업소 소유하고 잘 나갔지만
<자강갈비> 박재원 대표는 한 때 동서울에서 맥줏집, 일식집, 이자카야, 바 등 알짜배기 업소를 여럿 소유했다. 특히 대형 규모의 맥줏집은 유명 DJ(디스크자키)를 고용, 젊은 층의 고객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모 대학원 재학과 강남 라이온스클럽 회장 2회 연임을 통한 인적 네트워크도 탄탄하게 다졌다.


지인의 소개로 우연찮은 기회에 해외 명품 유통업까지 손을 댔다. 외식 서비스업보다 고상해 보이는 비즈니스였다. 이탈리아 명품을 국내 유명 백화점 명품 코너에 대주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꽤 큰돈도 벌고 비전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거액 사기를 당하면서 연속적인 사업 실패로 나락에 빠졌다.

업소들을 매각하고 빚잔치를 했다. 규모가 큰 빚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니 1억5000만원 정도 남았다. 그 돈으로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2011년 10월, 별다른 고려 없이 고깃집을 열었다.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시작하자는 부인의 말도 듣지 않았다. ‘내가 지금까지 손대서 실패한 외식업종은 없다’는 막연한 자만심도 들었다. 보증금 1억원에 나머지 5000만원으로 시설과 집기를 사들여 점포를 열었다.

박 대표의 생각대로 처음 3개월간은 잘 나갔다. 그동안 이런저런 연줄로 그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고객으로 개업 인사차 다녀갔다. 그런데 넉달이 지나자 웬만한 사람은 다녀가고 더 올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때부터 손님은 뚝 끊기고 매출이 줄었다. 개업 후 서너 달 동안 그런대로 경영이 괜찮았던 것은 착시현상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장사가 안되니 월 550만원의 임차료를 내기에도 벅찼다. 설상가상으로 오랜 수족처럼 일했던 숙련된 직원들도 하나둘 그의 곁을 떠났다. 외국에서 공부하던 자녀들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허리띠를 졸라맸다. 나중에는 시장 보러갈 돈도 없었다.

부인을 통해 처형에게 다른 핑계를 대고 100만원만 꿔달라고 해서 급전을 쓰기도 했다. 돈이 떨어지자 스스로 의기소침해지고 각종 모임에도 발을 끊었다.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그때 알게 되었다고 한다.

◇ 외식콘셉트 기획자와 함께 메뉴개발 홍보 등 전략 실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자 절박한 생각이 들었다. 한 달에 억대의 수입 올리는 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던 시절이 까마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데 무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우선 급한 대로 부인에게 가게를 맡기고 잘 되는 고깃집을 다니면서 배워보기로 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10군데 정도 잘 나가는 고깃집을 선정했다. 그중 경기도 고양시의 ‘ㅎ갈비’를 찾아갔다. 소문대로 손님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그 집 대표를 만나 조언을 듣고자 했으나 부재중이었다.

영업이 탄력받아 인천에도 분점을 준비 중인데, 바로 그 일로 인천에 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날 인천으로 가서 ‘ㅎ갈비’ 대표를 만났다. ‘ㅎ갈비’도 어려움에 처했다가 외식콘셉트 기획자의 도움을 받아 기사회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바로 이튿날 그 전문가에게 연락해 회생방안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전문가의 자문료조차 1/3만 결제하고 나머지는 뒤에 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전문가와 함께 메뉴 구성과 개선, 상호 변경, 점포 콘셉트, 홍보 전략 등 제반 경영 방안들을 새로 검토했다.

우선 ‘만가’라는 상호를 ‘자강갈비’로 바꾸고 간판과 P.O.P.를 교체했다. 한결 점포 이미지가 살아났다. 무기력하기만 했던 박 대표도 ‘스스로 쉼 없이 노력한다’는 상호 이름과 부합할 만큼 생기를 되찾았다. 결정적으로 자신감을 찾은 것은 전문가와 함께 벤치마킹 투어를 할 때였다. 잘 나가는 집들을 다니면서 전문가의 설명을 들어보니 자신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인도 이때 큰 용기와 힘을 얻었다고 한다.

메뉴는 월남쌈으로 업종전환을 하려고 했으나 전문가의 조언대로 자체 경쟁력이 있는 메뉴 위주로 재구성하기로 했다. 마침 전에 있던 찬모로부터 웬만한 메뉴나 찬류의 핵심 노하우는 박 대표가 모두 습득한 상태였다.
부진했던 점심 메뉴에 콩나물불고기돌솥밥(1만원)을 배치하고, 다른 곳에는 없는 갓김치막국수(7000원)를 여름철 식사메뉴와 육류 후식 메뉴(4000원)로 부각시키기로 했다. 이 전략은 바로 적중했다. 4월로 접어들면서 소문 듣고 찾아온 손님과 블로거들이 콩나물불고기돌솥밥과 갓김치막국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칭찬의 빈도와 함께 매출도 올라갔다.

◇ 방송 등 여러 매체의 찬사 속에 재기 성공
많은 블로거와 매체에서 박 대표의 인생역정과 이 메뉴들을 다뤘다. 금년 5월에는 KBS의 ‘생생정보통’에서 소개되었다. 방송이 나가자 주마가편 격으로 고객이 늘어났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이름의 대상이 그 이름의 가치에 따르려는 속성이 있다. 처음엔 생소했던 ‘자강갈비’라는 상호도 주인이나 손님이나 모두 익숙해졌다. 또한 상호와 점포 콘셉트와 업주 마인드가 일치하면서 시너지 효과가 났다.

박 대표는 본래 호텔조리학을 전공한 외식인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종사했던 맥줏집이나 이자카야도 넓은 의미에서 식음료를 판매하는 외식업이다. 고객을 중심으로 메뉴 구성을 하고 서비스를 제공해 수익을 창출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외식업과 다를 바 없다. 고깃집에 관한 세부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지 일반적인 외식업 경영에 대한 감각과 지식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전혀 외식업에 대한 경험도 마인드도 없었다면 아무리 뛰어난 조력자를 만났어도 쉽게 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부지런한 그의 천성이 성공을 견인했다. 지금 추세로 간다면 1~2년 후 서울에 점포를 추가로 열 계획이다.

새로운 점포는 단순한 고깃집이 아닌, 예전 박 대표 주 특기였던 DJ와 더불어 LP 레코드음악과 함께하는 멋진 업소를 운영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