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사자성어로 대학교수들은 ‘혼용무도(昏庸無道)’를 꼽았다. ‘나라 상황이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이다. 연초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청와대가 여당 원내대표에게 사퇴 압력을 가한 ‘국회법 개정안’ 파동,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과 민중총궐기, ‘민주화의 산증인’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등 올 한 해 한국 사회는 어지러웠다. 그 가운데 ‘박근혜 번역기’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지도층 인사들의 발언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기까지 했다. 2015년 대한민국을 뒤흔든 발언 5개를 되짚어본다.
◆“돈 받은 증거 나오면 목숨 내놓겠다”(이완구 전 국무총리. 2015.4.14.)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지난 4월14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만약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자신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성완종 리스트’ 후폭풍에 휘말려 재임 63일만에 사퇴함으로써 최단명 총리라는 오명을 썼다.
이에 앞서 지난 4월9일 오전 6시부터 약 50분간 경향신문과 전화 인터뷰를 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이날 오후 3시32분쯤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이 전 총리, 홍준표 경남도지사 등 자신이 돈을 건넸다고 주장한 정권 실세 8명의 리스트가 적힌 쪽지가 있었다.
검찰은 ‘성완종 리스트 특별수사팀’을 만들었지만 3개월에 걸친 수사 끝에 재판에 넘겨진 인물은 이 전 총리와 홍 지사 등 2명뿐이었다. 6명은 ‘혐의없음’ 또는 ‘공소권없음’ 처분을 받았다.
◆“메르스, 국가가 뚫린 것”(서울 삼성병원. 2015.6.11.)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2차 유행을 일으킨 삼성서울병원의 정두련 감염내과 과장은 지난 6월11일 국회 메르스 대책 특별위원회에서 “(삼성서울병원이 뚫린 게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라 말했다. 삼성병원은 다음날(6월12일) 메르스 집단 발생 사태에 대해 공식 입장자료를 내고 정 과장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사과했지만, 시민들은 그 발언에 동의했다.
보건당국이 메르스를 종식을 선언한 날은 지난 24일 0시였다. 5월20일 국내에 첫번째 메르스 환자가 확진된 뒤 7개월 만의 종식이었다. 메르스 사태로 인해 총 186명이 감염됐으며 이중 38명이 숨졌다. 치사율은 20.4%였다.
정부의 초기 대응은 허술했다. 방역 구멍이 뚫리면서 감염자는 끊이지 않았다. 첫 환자는 중동지역에서 메르스에 감염됐지만 입국 당시 증상이 없어 별다른 관리를 받지 못했다. 그는 입국 7일 만에 38도 이상 고열 등을 호소했고, 증상이 발현한 후에도 평택성모병원과 삼성서울병원 등 병의원 4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여기에 보건당국의 잇단 오판과 소홀한 병원 감염 관리, 북적이는 응급실, 병문안 문화, 대형병원 쏠림 현상 등 우리나라의 허술한 공공의료체계가 메르스 확산을 불러 일으켰다. 메르스는 종식됐지만, 한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세계 2위의 메르스 발병국이라는 오명을 썼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유승민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 2015.7.8.)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57)은 지난 7월8일 원내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앞선 6월25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을 행사하며 유 전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의 정치 심판론’을 언급한 지 13일만이었다. 그의 퇴임의 말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정신’이었다.
사실 유 전 원내대표는 지난 2013년부터 박 대통령과 각을 세웠다. 그는 그해 3월 열린 첫 당·정·청 회의에서 박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 전 원내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의 1호 인사(대통령직인수위 첫 인사)에 대해 한마디 했는데 안 고쳐지는 것을 보고 입을 닫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또 “대한민국 보수의 수준이 이 정도인가 가슴 아프다”는 말도 남겼다. 박 대통령에게 유 전 원내대표는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지난 6월 말, 유 전 원내대표는 ‘국회법개정안’에 대한 표결을 안 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혔다.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배신의 정치”라 비판했다. 이른바 ‘유승민 찍어내기’와 함께 ‘국회법개정안’ 파동이 일었다.
“나는 왜 정치를 하는가?” 유 전 원내대표는 지난 16년간 매일 스스로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전했다. 그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고 다짐했다.
◆“복면시위 금지해야… IS도 얼굴 감추고 테러”(박근혜 대통령. 2015.11.2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11월24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복면 시위는 못하도록 해야 한다. IS도 그렇게 지금 하고 있지 않느냐”라며 집회자를 IS에 비유해 논란이 일었다. 앞서 11월14일 노동·농민·시민사회단체의 광화문 집회(1차 민중총궐기)를 놓고 “이 같은 불법 폭력 행위는 대한민국 법치를 부정하고 정부를 무력화시키는 의도”라고 말하며 나온 발언이었다.
1차 민중총궐기 당시 경찰의 물대포 진압으로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 씨와 관련한 사과는 없었다. 강신명 경찰청장도 이후 ‘유감’ 표명에만 그쳤다. 강 청장은 오히려 ‘2차 민중총궐기’를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통해 “집회신고에 기재돼 있는 주체, 내용, 목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집시법 5조에 있는 폭력행위 등으로 공공의 안녕에 위협을 줄 것이 명백할 경우 집회를 불허할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여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특히 파리 동시다발 테러로 촉발된 반테러·공포 분위기에 박 대통령이 편승, 테러방지법·복면금지법과 같은 공안입법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다. ‘신공안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외신도 한국 정부의 행태를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1월19일 “한국 정부, 반대 의견을 억눌러”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자랑스러운 민주주의적 자유를 퇴행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김영삼 전 대통령)
지난 11월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는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보여준 산증인이었다. 그의 평가는 사후에 달라졌다. 민주화 역행 흐름 속에서 시민들은 그를 ‘민주화 지도자’로서의 행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사실 1990년 말 김 전 대통령이 선택한 3당 합당은 한국 정치를 퇴행시킨 사건이었다. 민주화를 이끈 지도자가 무력으로 정권을 쥔 신군부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정치’라고 미화될 수는 없었다. 그의 3당 합당으로 호남은 더 고립됐다. 한국정치가 지역주의의 그늘에서 벗어나기가 요원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올해, 시민들은 그를 ‘민주화의 거목’이라 기억했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의 생전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이 회자됐다.
대학 교수들도 올 한 해 한국의 상황을 가리켜 “청와대가 여당 원내대표에게 사퇴 압력을 가하면서 삼권분립과 의회주의 원칙이 크게 훼손됐다”고 비판하며 ‘나라 상황이 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는 뜻의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