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입사원 공채 시즌인 3월 들어서도 아직까지 올해 채용과 투자 규모를 확정하지 못한 대기업이 상당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외 경기불안으로 경제 전반에 걸쳐 불확실성이 커졌지만 기업들의 고용·투자 확대를 촉구하는 정부의 압박에 선뜻 올해 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것으로 풀이된다. 기업들이 통상 연초에 고용과 투자계획을 확정짓던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1분기 다가도록 큰 그림 못 그려
지난달 말 고용노동부가 30대 그룹의 올해 채용계획을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1개 그룹이 계획을 확정했다. 이들 그룹의 올해 채용규모는 6만5092명으로 지난해(6만4677명)보다 415명(0.6%) 늘어나는 데 그쳤다. 나머지 9개 그룹은 ‘경영상 문제’ 등을 이유로 채용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고용정보원도 최근 발간한 <고용 이슈> 1월호에서 올해 신규 취업자 수가 29만9000명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2010년 이후 5년 만에 최저 수준을 기록한 지난해 취업자 증가폭(33만7000여명)을 크게 밑도는 수치이자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취업자 수가 7만1000여명 감소한 2009년 이후 최저치다.
고용정보원 관계자는 “올해는 내수 부진 탓에 도·소매업의 고용 부진이 지속되고 중국 경기둔화와 저유가 등으로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는 등 주력 제조업의 고용둔화 압력 요인이 작용해 취업자 증가폭이 예년만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10대 그룹은 대다수가 올해 채용계획을 확정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머니위크> 취재 결과 삼성, 현대차, 포스코, LG, 롯데 등 재계서열 최상위 기업들은 올해 전체 채용 규모를 아직까지 확정하지 못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올해 채용 계획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며 “지난해 수준(1만4000명 채용)에 맞추려고 하나 다소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삼성은 방위산업부문 계열사 삼성테크윈과 삼성탈레스를 한화에, 석유화학부문 계열사 삼성정밀화학, 삼성BP화학, 삼성SDI 케미칼사업부문은 롯데에 매각해 인력 수요가 크게 줄어들었다. 또 올해에도 그룹의 지주사 격인 통합 삼성물산의 조직개편에 따라 추가로 인력이 감소할 여지가 있어 고용을 늘리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현대자동차그룹도 자율주행차 등 미래 먹거리 분야의 R&D(연구개발) 인력 수요가 꾸준히 늘고 서울 삼성동 옛 한국전력 부지에 짓는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설립에 따른 고용 수요가 있지만 아직까지 채용 규모를 확정하지 못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계열사별 신규채용은 시작됐지만 그룹 전체 채용 규모는 아직 집계가 안됐다”며 “상시채용을 하는 특 특성상 올해 전체 채용인원을 정확히 예단할 수 없지만 R&D 투자 확대 등으로 지난해 채용 규모(9500명)보다는 소폭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LG·롯데·포스코그룹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LG그룹 관계자는 “계열사별 신규채용은 시작됐지만 그룹 차원에서 전체 채용 규모가 집계되지 않았다”며 “투자 규모도 취합 중”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 관계자는 “올해 신규 채용 규모는 3월 말까지 각 계열사별 자료를 취합해 발표할 예정”이라며 “예년(1만5800명)과 비슷한 수준으로 채용할 것이라는 일부 언론 보도가 나왔는데 공식적으로 우리가 이런 내용을 밝힌 적은 없으며 아직까지 계열사별 채용 인원에 대한 집계가 끝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투자계획은 내부적으로 확정이 됐지만 공개는 하지 않을 예정”이라며 “투자 규모를 공개하는 기업도 있고 안하는 기업도 있는데 계획은 일년에 열두번도 더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어 공개하지 않을 예정”이라고 말했다.
포스코그룹 관계자도 “채용 규모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현대중공업그룹(2000여명), 한진그룹(3300여명), 한화그룹(5100여명) 등은 예년과 비슷하거나 소폭 줄어든 인원을 채용할 것으로 알려졌다.
SK그룹은 올해 지난해(8000명)보다 400명 늘어난 8400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SK그룹 관계자는 “경영환경이 여전히 어렵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일자리 창출을 통해 경제활성화에 기여하기 위해 채용 규모를 확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국내외 경기불안의 영향이 대기업들의 채용 한파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셈이다. 정부가 재계에 일자리 창출을 지속적으로 요청하는데도 대기업이 실제 고용을 늘리지 못하거나 고용·투자 규모를 확정하지 못하는 점은 그만큼 경기 불황이 심각함을 보여준다.
◆정부, 일자리 확대 올인했지만…
박근혜 정부는 임기 4년차 국정 운영의 초점을 일자리 확대에 맞췄다. 정권 출범 첫해부터 ‘고용률 70% 로드맵’을 발표할 정도로 일자리 창출을 지속적으로 강조한 현 정부는 아직까지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오지 않자 올해 최우선 국정과제로 일자리 창출을 강조했다.
지난 3년간 수치로 드러난 고용률은 상승했지만 청년(15∼29세) 실업률도 함께 오르며 들인 공이 무색하게 고용 체감률은 저조하다. 실제 지난해 고용률은 65.7%로 역대 최고치였지만 청년 실업률도 9.2%로 가장 높았다.
이는 정부의 방침에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기업들이 비정규직 채용을 늘리며 ‘불안한 고용’을 확대한 결과로 풀이된다. 경기가 살아나 기업들이 전략과 필요에 의해 신규채용을 하는 게 아니라 정부의 압박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채용 숫자를 늘리다 보니 비정규직 채용이 많았고 그 결과 한시적 취업자 증가로 고용률과 실업률이 함께 올라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는 얘기다.
특히 청년 고용률은 41.5%, 여성 고용률은 55.7%로 전체 고용률 65.7%에 크게 못 미친다. 4·13총선이 한달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가뜩이나 젊은층의 지지도가 낮은 정부·여당에게 청년 고용 한파는 선거에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짙다.
재계 한 관계자는 “정부의 투자·채용 확대 기조를 감안해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기업들이 정부 눈치를 보며 올해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다”며 “중국 경기 둔화, 금융시장 불안, 저유가 등의 국내외 상황을 감안하면 올해 구상을 밝힌 기업들도 실제 계획이 지켜질지 여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2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