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보다 ‘안정’을 추구하던 국내 제약업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막대한 투자비용, 긴 개발기간, 낮은 성공확률 등을 이유로 신약 개발에 소극적이던 제약사들이 앞다퉈 연구개발(R&D) 투자규모를 늘리고 있는 것. 최근 10년간 1조원 가량을 R&D에 투자한 끝에 지난해 8조원대 기술수출 대박을 터트린 한미약품의 성공이 제약업계 전반에 ‘개발 본능’을 일깨운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제약사별 상황에 따라 투자규모, 투자유형 등에선 온도차가 뚜렷하다.


/사진=이미지투데이

◆R&D 인식 전환
한국다국적의약산업협회가 최근 발간한 2015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R&D를 통해 개발된 혁신적 의약품은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수명 연장 및 사망률 감소에 기여해 왔다. 예컨대 미국에선 2000~2009년 연령보정 암 사망률이 13.8%나 감소했는데, 이 중 8.0%는 의약품의 혁신에 기인한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제약사들의 매출액 대비 평균 R&D 투자비용은 국내 제약업계의 2배가 넘는 25% 수준이다. 제약사의 신약 개발 노력이 생명 연장과 삶의 질 향상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 통계로 확인된 셈이다.


산업적 가치도 충분하다. 식품의약품안전처 자료에 따르면 세계 제약시장 규모는 약 1000조원으로 자동차산업(약 600조원), 반도체·전자산업(약 400조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나아가 고령화 시대에 제약산업은 더욱 성장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 평가다. 국내 제약사들이 20조원에 불과한 국내시장을 넘어 세계로 향해야 하는 이유다.

국내 제약사가 글로벌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선 경쟁력 있는 신약 확보가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지난해 한미약품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제약사들이 저마다의 특수한 상황을 감안해 다양한 R&D 투자전략을 펼치고 있다.

한미약품은 지난해 매출액의 14.2%(1872억원)를 R&D에 투자한 데 이어 올 1분기에도 421억원을 투자하며 업계 1위를 차지했다. 한미약품은 보유 중인 20여개의 파이프라인(신약후보물질)을 중심으로 가능성이 높은 후보물질 위주로 R&D에 집중할 계획이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항암·바이오 신약 위주로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대웅제약(270억원)과 종근당(270억원)이 올 1분기 비슷한 규모의 R&D 투자를 단행하며 경쟁에 불을 지폈다. 다만 양사의 투자규모는 비슷하지만 주력하는 연구분야는 다르다. 대웅제약 관계자는 “구체적 연구현황을 다 오픈할 수는 없지만 바이오시밀러(바이오복제약) ‘나보타’(보톡스)의 미국 임상 3상을 진행하면서 현지 진출에 주력하고 자체 개발한 개량 신약 ‘올로스타’(고혈압·고지혈증 복합제)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며 “올해는 바이오시밀러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줄기세포 등 새로운 분야에 대한 투자도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종근당 관계자는 “고지혈증치료제, 빈혈치료제, 표적항암제, 바이오 신약 개발 등에 집중하고 있다”며 “제네릭(복제약)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부 비용을 투자해 올해 전체적으로 1000억원 이상을 R&D에 투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상위 제약사 중 보수적 투자로 유명한 유한양행도 올 1분기 192억원을 투자하며 R&D 열풍에 가세했다. 이는 전년 동기(140억원) 대비 39%가량 늘어난 수치다. 그간 다른 상위 제약사에 비해 R&D 투자규모가 작아 파이프라인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을 만회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유한양행은 경쟁사에 비해 출발이 다소 늦은 만큼 격차를 줄이기 위해 차별화된 행보를 보인다. 지난 3월 유한양행은 120억원을 투자해 미국의 항체 신약 개발 전문회사인 ‘소렌토’와 합작투자회사 ‘이뮨온시아 유한회사’를 설립했다. 국내 제약사 중 약품 개발을 목적으로 해외업체와 R&D 전문 합작투자사를 설립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 R&D에 810억원을 투자한 LG생명과학도 올해 투자비용을 더 늘릴 계획이다. LG생명과학 관계자는 “회사의 모태가 유전공학연구소인 만큼 신약 개발에 중점을 두며 올해 850억원가량의 R&D 투자를 진행할 예정”이라며 “백신, 대사질환 치료제, 바이오의약품 등 세 분야에 집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동아에스티는 지난해 매출액 대비 10.1%(574억원)를 R&D에 투자한 데 이어 올 1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20%가량 투자비용을 늘렸다. 동아에스티 관계자는 “글로벌시장에서 미충족 수요가 높은 분야인 항생제, 대사 내분비, 항암제 등의 분야를 중심으로 글로벌시장 진출이 가능한 과제를 ‘글로벌 스타 프로젝트’로 선정해 집중 개발하고 있다”며 “해외 임상을 적극적으로 확대해 향후 5년 내 글로벌시장에서 의미 있는 경쟁력과 가치를 가진 신약후보를 2개 이상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유나이티드제약 R&D팀. /사진제공=유나이티드제약

◆상황별 제각각 R&D 유형
이처럼 상위 제약사들이 신약에 치중하는 반면 중소제약사들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신약 개발 실패에 따른 후폭풍을 감당하기 힘든 이들은 대다수가 안정적인 제네릭 개발·생산에 집중한다.

다만 일부 중소제약사의 경우 기술력은 있지만 자본이 부족한 바이오벤처를 찾아 지분 투자를 확대하거나 바이오업체의 파이프라인 R&D에 공동으로 참여해 성과를 나눠 갖는 방식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

중소제약업체 관계자는 “신약 개발에는 천문학적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지만 성공확률이 낮아 중소제약사의 경우 신약 개발에 나섰다가 실패하면 기업의 존립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경쟁이 치열하기는 하지만 개발 비용이 수십억원에 불과하고 개발 기간도 짧은 제네릭에 집중하는 게 안정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반면 회사의 규모는 크지만 여전히 도전보다 안정을 택한 기업도 있다. 상위 제약사 20곳 중 광동제약, 제일약품, 동국제약은 지난해 매출액 대비 R&D 투자비용이 각각 1.1%, 3.4%, 3.9%에 그쳤다. 업계 관계자는 “중소제약사 중에서도 한국유나이티드제약, 대원제약 등은 R&D 투자비용을 늘리며 상대적으로 신약보다 위험성이 적은 개량신약 개발에 집중한다”며 “일부 업체가 여전히 R&D에 인색한 모습을 보이지만 한미약품의 성공을 계기로 업계 전반에 불기 시작한 R&D 열풍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6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