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원/달러 환율은 위기의 가늠자 역할을 해왔다. 1997년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경제의 구조적 모순이나 글로벌 경기 침체 신호를 가장 먼저 드러낸 것은 '탄광 속의 카나리아'로 불린 외환시장이었다. 그러나 최근 환율 상승은 과거 급등기와는 결이 다르다. 글로벌 경제는 비교적 양호하고 국내 기업 실적은 인공지능(AI) 붐을 타고 개선되고 있다. 그럼에도 환율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현상은 실물 경제 지표와 통화 가치가 따로 움직이는 '디커플링(Decoupling)'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이를 일시적인 수급 불안이나 심리적 요인으로 진단하지만 시장 평가는 냉정하다. 개인 수급 이탈과 산업 구조 변화, 국가 펀더멘털 약화 우려라는 삼중 부담이 겹친 구조적 결과라는 것이다.


부자들이 한국을 떠난다… 서학개미발 자금유출도 봇물
최근 국내 증시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해외로 향하는 '서학개미'의 발길은 멈추지 않고 있다. 미국 주식 순매수 규모는 2026년 들어서도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정부는 투자자문업(RIA) 제도 도입 등을 통해 자금 흐름의 국내 복귀를 유도하고 있으나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AI 시대를 주도하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미국에 집중돼 있다. 투자 기회가 국내보다 미국 등 외국에 더 많다는 것이다. 일본과 홍콩 등 금융 선진국과 비교해 한국 가계의 외화 자산 비중이 여전히 낮다는 점에서 자금 유출 흐름은 당분간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케 하는 이유다.


아울러 과도한 상속·증여세 부담을 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는 사례도 빠르게 늘고 있다. 매년 해외로 빠져나가는 자산 규모는 최소 수 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자산가들의 '탈 한국'은 원화 자산 매도와 외화 자산 매수로 이어지며 환율 상승 압력을 키운다.

'국외전출세' 신고 세액은 제도 도입 초기인 2016년 수십억 원 수준에서 최근 수천억 원 규모로 급증했다. 글로벌 시민권 자문사 헨리 앤 파트너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순자산 100만 달러 이상 자산가 순유출국 순위에서 세계 4위를 기록했다. 특히 2025년 한 해에만 약 2400명의 백만장자가 한국을 떠난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1~2년 전 연간 1000명 수준에서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더 많이 돈 나가는 구조'의 고착화
정부는 경상수지 흑자를 근거로 환율 안정을 기대하고 있지만 이는 '숫자의 함정'에 가깝다. '수출 호조 = 달러 유입 = 환율 하락'이라는 공식이 미국의 강력한 리쇼어링 정책으로 더 이상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성 SK 현대차 등 주요 그룹이 약속한 대미 투자 규모는 105조원을 웃돈다. 기업들은 수출로 번 달러를 국내로 들여오기보다 미국 현지 공장 건설에 재투입하고 있다. 장부상 흑자는 유지되지만 외환시장에 공급되는 달러는 제한적인 구조다. 향후 10년간 연간 최대 200억 달러 규모로 예정된 대미 투자 역시 외환시장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시장에서는 단기 환율 하락이 대미 투자를 위한 저가 매수 수요를 자극해 환율 하단을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게다가 정부가 믿고 있는 수출 호조 역시 그 기반이 취약하다는 지적이다. 한국 수출 구조는 반도체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 무역수지 흑자의 80% 이상이 반도체에서 발생하고 있고 반도체를 제외하면 무역수지는 사실상 적자에 가깝다. 석유화학과 철강 등 과거 주력 산업은 중국의 저가 공세에 밀려 구조적 부진이 장기화하고 있다. 반도체 경기 사이클이 꺾일 경우 재정 부담이 확대되며 환율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반도체 대안으로 거론되는 조선업 역시 환율 방어 역할을 맡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다. 선박 인도 시점에 대금 대부분을 받는 '헤비테일(Heavy-tail)' 결제 구조로 수주와 달러 유입 사이에 시차가 존재한다. 환헤지 비율도 과거보다 낮아 선물환 매도를 통한 환율 안정 효과는 제한적이다.

'외환시장의 고래'로 불리는 국민연금도 원화 약세를 심화시키고 있다. 국민연금은 2029년까지 해외 자산 비중을 60%로 확대할 계획이다. 매년 수십조 원 규모의 원화를 달러로 바꾸는 수요가 구조적으로 발생한다는 의미다. 해외 자산 환헤지 확대나 자산 배분 조정 등 방안이 거론되지만 단기 처방에 그칠 것이란 시각이 우세하다.

한국의 통화 정책 환경도 한미 금리 역전 장기화를 부추기고 있다. 최근까지 5회 연속으로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기준금리 동결을 결정한 것도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 원/달러 환율과 날로 늘어만 가는 가계부채 때문이었다. 이미 한국 기준금리(1월말 기준 2.50%)는 미국(3.50~3.75%)의 상단에 비해 1.25%포인트 낮다. 적극적인 통화 정책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자본유출 유인이 더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커진다.

줄어만 가는 인구, 원화가치 장기 리스크
환율을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위험 요인은 국가 재정과 인구 구조다. 국가채무비율이 높아질수록 환율의 하단이 단계적으로 올라가는 흐름이 관측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30%대였던 시기 환율 하단은 1050원 수준이었지만 50%를 넘어서면서 1300원대로 높아졌다.
영국의 트러스 사태와 일본 엔저 사례는 기축통화국이라도 재정 규율이 흔들리면 통화 가치 하락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을 보여준다. 비기축통화국인 한국은 IMF가 권고한 GDP 대비 채무비율 60%를 넘길 경우 국가 신용등급 하락과 외국인 자본 이탈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저출산과 고령화는 세입 기반을 약화시키고 복지 지출을 늘려 재정 부담을 가중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현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60년 국민 1인당 국가채무가 1억 원을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생산가능인구는 줄어드는데 부담해야 할 부채가 늘어나는 구조에서 통화 가치 하락은 장기적으로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종합하면 현재 1400원대 환율은 일시적 변동이 아니라 수급 구조 변화와 산업 편중, 펀더멘털 약화가 맞물린 결과다. 과거 평균으로 환율이 되돌아갈 것이란 기대는 현실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인위적 환율 방어보다 재정 준칙 법제화와 산업 경쟁력 강화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기업과 개인 투자자 역시 원화 약세를 전제로 한 전략 조정이 불가피하다. 달러 자산 비중 확대를 단순한 투자 수단이 아닌 자산 가치 보전을 위한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 접근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