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이란 가면을 쓴 사행성의 늪
[머니S리포트-‘확률형 아이템’ 버닝썬보다 더 중독되네②] 높아진 불신의 벽… 이젠 바꿔야 할 때
팽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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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X5 형태의 25칸 빙고를 완성하면 ‘레어 아이템’을 받을 수 있다. 빙고를 채우기 위해선 현금 결제로만 얻을 수 있는 빙고카드가 필요하다. 이용자는 각 칸의 숫자가 나올 확률을 알 수 없다. 하지만 23칸까지 원활하게 채워져 나가는 빙고에 ‘나 운이 좀 좋은 사람인가’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2칸을 남기고 막힌다. 이용자는 23칸에 투자한 돈이 아까워 나머지 2칸을 채울 때까지 돈을 쓰게 된다. 23칸에 들어간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들어간다. 빙고카드 한 장의 가격은 590원이지만 결국 레어 아이템을 얻는 데는 많게는 10만원 이상이 든다. 이를 반복한 이용자는 같은 25칸을 뽑더라도 앞쪽 칸과 나머지 두 칸에 걸릴 확률이 묘하게 다르다는 심증과 배신감을 가지게 된다. 다만 게임업계는 이 빙고의 확률을 알리지 않는다. 확률정보는 현재 게임업계의 유일한 경쟁력으로 ‘영업비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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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게임업계 고질병이었던 확률형 아이템 관련 논란이 곧 종착역에 다다를 분위기다. /사진=이미지투데이 |
확률이 게임업계와 국회까지 시끌시끌하게 만들고 있다. 바로 온라인·모바일 게임의 ‘확률형 아이템’ 때문이다. 그 사행성 때문에 이용자의 과소비를 부추긴다고 지적받고 있다. 과거에도 수차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오랜 논란에 드디어 한계에 다다른 느낌이다.
게임법 전면개정 추진… “확률 공개하라”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은 15년 만에 게임산업진흥에관한법률(게임법) 전부개정이 추진되면서부터다. 2006년 제정된 게임법은 이름과 달리 게임산업 진흥보다는 게임물 심의나 게임 과몰입 예방 등 규제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아왔다.이에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초 대토론회를 통해 게임법 개정안 초안을 공개했다. 이를 바탕으로 다듬어진 전면개정안이 이상헌 의원(더불어민주당·울산 북구) 대표 발의로 지난해 말 국회에 제출됐다. 이번 전면개정안에는 해외 게임사의 ‘먹튀’를 방지하기 위한 국내 대리인 지정 제도와 게임 등급분류 절차 간소화 등 많은 내용이 담겼다.
이 중 확률형 아이템 관련 조항(의안 제59조제1항)이 포함돼 화두로 떠올랐다. 유통·제공되는 게임에 대해 등급 등 기본정보와 함께 유상으로 구매하는 확률형 아이템의 종류와 개별 공급 확률도 표시하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게임법 개정안 전반에 대한 의견서를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여·야 의원실에 지난달 제출했다.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서는 “고사양 아이템을 일정 비율 미만으로 제한하는 등의 밸런스는 게임의 재미를 위한 가장 본질적 부분 중 하나다. 상당한 비용을 투자해 연구하며 사업자가 관리해야 하는 대표적 영업비밀”이라며 전면적인 확률 공개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다.
반면 한국게임학회는 “산업계에서 제시한 ‘확률형 아이템 정보는 영업비밀’이라는 논리는 그 자체로 모순”이라며 게임법 개정안에 포함된 대로 게임 아이템 확률 정보가 정확하게 공개돼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냈다. 이 성명서는 “최근 게임사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트럭 시위’ 등 이용자가 게임사를 강력히 비판하는 사태가 빈발하고 있는 것을 깊이 우려한다”며 “이번 게임법 개정안 처리에서 문체부와 국회 문체위의 주도적 역할을 촉구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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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글로벌 히트를 기록한 중국 미호요 ‘원신’. 확률형 아이템이 있지만 이용자 간 경쟁을 유발하며 과금을 유도하진 않는다는 점이 국내 시장 흥행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사진=미호요 |
자율규제 하고 있지만… 유명무실?
국내 게입업계는 2015년부터 유료 확률형 아이템 자율규제를 실시하고 있다. 현재 한국게임정책자율기구를 통해 확률을 공개하지 않은 게임물을 매달 발표한다. 올 1월 자율규제 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자율규제 준수율이 국내 게임사들은 99.1%, 해외 게임사들은 59.2%로 큰 차이를 보인다. 한국게임산업협회 회원사 기준으로는 100%다. 이 때문에 확률형 아이템 규제가 역차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다.하지만 한국게임학회는 이런 자율규제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자율규제에 참여하는 게임사가 실질적으로 엔씨·넥슨·넷마블 등 7개사에 머물러 있다. 법적 강제력이 없으므로 신고한 확률이 정확한지 알 수 없고 위반 시 불이익도 없다. 이용자 사이에서도 유명무실하다는 불만이 제기된다.
규제 대상이 ‘캡슐형 유료 아이템 제공 게임물’로 한정돼있는 점도 지적된다. 최근에 주로 문제가 불거지는 ‘컴플리트 가챠’는 대상에서 벗어나 있어 확률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컴플리트 가챠는 특정 아이템을 조합해 상위 아이템으로 교환할 수 있게 하는 방식을 말한다. 유료와 무료의 복수 아이템을 결합해 제3의 아이템을 생성하도록 하면 정작 이용자가 궁금해하는 해당 아이템의 확률은 알 수 없게 된다. 일본의 경우 사행성을 이유로 지난해 ‘컴플리트 가챠’를 소비자청 고시로 금지한 상태다.
국내에서도 확률형 아이템 관련 행정 처분 사례가 늘고 있다. 2019년 8월 서울고등법원은 확률형 아이템 지급 관련해 소비자에게 충분히 알리지 않은 행위에 대해 전자상거래법을 위반했다고 선고한 바 있다. 이 사례에서는 확률을 ‘랜덤’이라고만 표시하고 일부 퍼즐 조각의 확률을 인위적으로 낮게 설정했음에도 알리지 않았다. 2018년 5월에도 한 게임사가 ‘획득 확률이 대폭 증가된다’고 광고한 것이 0.002% 상승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과장광고로 시정명령이 내려진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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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논란과 규제 움직임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는다. 네덜란드 게임 당국은 미국 EA(일렉트로닉아츠)의 피파(FIFA) 시리즈의 확률형 아이템이 도박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000만유로(약 132억원) 벌금을 부과했다. /사진=EA |
‘찰떡궁합’ 이룬 부분 유료화 모델과 확률형 아이템
최근 넥슨이 기존에 공개해온 캡슐형 아이템은 물론 유료 강화와 합성 유형의 아이템 확률 정보도 전면 공개하기로 하는 등 국내 게임사들도 이용자들의 요구에 점차 순응하는 분위기다. 게임사들이 그동안 확률 공개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관련 논란이 수년간 이어졌음에도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한 이유는 결국 수익 때문이다.과거 국내 게임산업 초창기에 게임사는 만연한 불법 복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PC방과 온라인 게임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정이 나아졌지만 정액제가 기본이어서 이용자와 수익 확보는 현재처럼 좋지 못했다.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20년 전부터다. 게임접속은 무료이되 게임 내에서 유료아이템을 판매하는 ‘부분 유료화’ 수익모델을 2001년 시도한 이후다. 이는 수년 후 등장한 확률형 아이템과 맞물려 대폭 시너지를 내게 된다. 모두 국내 게임사인 넥슨이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것들이다.
넥슨은 2004년 MMORPG(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 ‘메이플스토리’ 일본판에 1장당 100엔짜리 ‘가챠폰티켓’이라는 아이템을 선보였다. 그 원형은 과거 동네 문방구 앞에서 볼 수 있었던 캡슐 뽑기(가챠)다. 티켓을 ‘가챠폰’(뽑기 자판기)에 넣으면 무작위로 아이템이 나오는 방식이다. 이런 랜덤박스 방식은 이듬해 국내에 서비스되는 메이플스토리에도 ‘부화기’라는 형태로 처음 적용됐다.
우연적 요소로 종류·효과·성능 등이 결정되는 확률형 아이템은 부분 유료화 수익모델과 함께 게임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넥슨의 급성장과 함께 국내 게임업계에 확산돼 업계 전체의 수익 상승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글로벌 시장에서도 선전하며 전세계 게임업계로 퍼져나갔다.
국내 시장 주류가 모바일게임으로 바뀐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무료로 게임을 이용 가능하므로 이용자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이용자 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필연적으로 과금이 요구돼 밸런스가 무너지는 단점도 그대로 이어졌다. 게임 타이틀을 구매하는 방식의 패키지 게임 위주인 콘솔 시장의 비중이 과거 게임업계가 겪었던 어려움과 플랫폼 문제 등 복합적인 이유로 해외보다 작은 것도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장르와 회사마다 편차가 크겠지만 대체로 모바일게임의 경우 전체 이용자의 5%가량을 차지하는 헤비유저로부터 게임 매출의 70% 이상이 나오는 구조”라며 “현재로서는 랜덤박스와 인챈트(아이템 강화)를 비롯한 확률 기반 수익모델이 국내 게임사 매출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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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스토리)로 호평받은 일본 게임들인 ‘저지아이즈 사신의 유언’과 ‘13기병방위권’. 저지아이즈는 일본 톱스타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을 맡았고 13기병방위권은 SF문학상 세이운상(星雲賞) 후보에도 올랐다. /사진=세가퍼블리싱코리아 |
이젠 과거에서 벗어나야 할 때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피로감과 불신은 국내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커지는 상황이다. 그 사행성을 규제하려는 움직임도 점점 늘고 있다. 중국은 랜덤박스의 모든 확률을 공개하는 의무 조항을 2017년 발표하며 전세계 최초로 규제를 적용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는 2018년부터 도박으로 분류하고 있으며 영국 의회에서도 규제 적용이 추진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몇몇 주에선 어린이는 구매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박혁태 한국콘텐츠진흥원 산업정책팀장은 “중국과 미국 등 해외 모바일게임이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확률형 아이템 요소가 거의 없는 콘솔형 게임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며 “확률 공개 의무화의 실익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환경 속에서 게임사와 이용자 간 불신이 지속된다면 결국 한국 게임 이용자가 한국 게임에 등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동안 국내 게임업계는 전략적인 육성을 꾀한 중국 등과 달리 정책적인 진흥보다는 규제를 받아왔다. 이에 확률형 아이템 규제도 유명무실해진 셧다운제 등 기존의 제도들처럼 과잉규제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용자들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게임사들의 발목을 잡지 않는 정책이 요구된다.
이상헌의원실 측은 “과잉규제가 이뤄져선 안 된다는 데 공감한다. 사실 민간 자율규제가 잘 이뤄지면 가장 좋다. 그러나 그동안 수차례 자율규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이용자들의 불만과 피해는 오히려 커져만 갔다”며 “확률 공개는 이용자들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알 권리다. 확률이 공개돼도 매출에 큰 영향을 끼치지 않으리란 예측이 대다수다. 자율규제로 이미 확률이 공개되고 있기에 과잉규제가 될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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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 관련 논란이 있었음에도 전작의 후광에 힘입어 2020 올해의게임(GOTY·고티)을 휩쓴 미국 너티독 ‘라스트오브어스2’. 확률형 아이템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게임이지만 유저들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점은 같다. /사진=SIEK |
확률형 아이템의 확률 공개 문제는 현재 국내 게임사의 당면과제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지엽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게임 이용자는 국내 게임사가 게임 콘텐츠의 품질과 완성도로 승부하고 수익을 내길 기대한다. 콘텐츠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했던 시절은 지나갔고 기업의 덩치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커졌다. 특정 수익모델에 얽매이지 않고 콘텐츠로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음에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확률형 아이템의 늪에 빠진 것은 게임사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김영진 청강대 게임학과 교수는 “이제 국내 게임사도 그동안 특정 영역에서 안주해왔던 모습에서 벗어나 콘텐츠 기업으로서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 급선무는 이용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며 “국내 개발자와 학생들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의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이들의 역량이 단기적인 수익 창출에 소모되지 않고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김영진 청강대 게임학과 교수는 “이제 국내 게임사도 그동안 특정 영역에서 안주해왔던 모습에서 벗어나 콘텐츠 기업으로서 경쟁력을 제고해야 한다. 급선무는 이용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라며 “국내 개발자와 학생들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창의력과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이들의 역량이 단기적인 수익 창출에 소모되지 않고 충분히 활용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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