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억원대의 재산을 보유한 김모씨(남·70)는 얼마 전 장애인신탁 상품에 가입하려고 금융사에 들렸다가 상품설명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예치기간에 상관없이 원금을 찾으면 세금(증여세)을 내야 하고 안전성을 따져야 하는 특성 때문에 기대수익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입금액 5억원까지만 증여세 면제 혜택이 주어지는 것과 이자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점이 김씨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됐다. 김씨는 "지적장애를 겪는 아들을 위해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안전하게 물려주고 싶었는데 막상 장애인신탁에 대한 설명을 들어보니 혜택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장애인신탁이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신탁은 현금이나 유가증권, 부동산 등의 재산을 제3자(수탁자)에게 맡겨 관리나 운용 등의 절차를 위탁하는 상품을 일컫는다. 수탁자는 은행과 보험사, 증권사 등 금융권 등이다.
 
'팔·다리 못 되는' 장애인신탁
 
◆가입자 혜택 미미… 사실상 과세 

이중 장애인신탁은 경제력이 있는 부모가 지적장애 등으로 사회적·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녀를 위해 가입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가 갑자기 불의의 사고를 당하거나 노환 등으로 사망했을 때를 대비해 자신의 재산권을 안전하게 상속할 수 있도록 수탁자에게 위임해 주는 것. 지적능력이나 판단력이 미흡한 자녀들의 상속재산을 친인척이나 제3자가 편법으로 가로채지 못하게 막아주는 상속보호 금융상품인 셈이다.
 
신탁은 현금은 물론 상가, 건물 등 부동산으로도 신청이 가능하다. 예컨대 현금으로 신청할 경우 가입한 다음달부터 원금의 이자를 가입자가 지정한 사람에게 지급한다. 부동산도 수탁자가 대신 관리하고 운영해준다.
 
신청은 지적장애뿐만 아니라 국가에서 장애인 등급이 지정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하지만 장애인신탁은 아직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금융투자협회가 조사한 자료를 보면 5월 중 신한은행과 하나은행, 삼성생명, 미래에셋생명, 대한생명에서 장애인신탁을 가입한 총 금액은 63억원에 불과하다. 가입건수는 고작 14건에 그쳤다. 국내 대형은행과 보험사들이 장애인신탁을 취급하고 있지만 시장개척이 미흡하다는 평가다.
 
장애인신탁 가입률이 저조한 이유는 전문가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고객들이 장애인신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과 장애인신탁의 혜택이 미미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엇갈린다. 그러나 금융기관의 마케팅(홍보)이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해도 이 상품의 혜택이 많았다면 가입실적이 지금처럼 낮은 수준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우세하다.
 
장애인신탁은 5억원까지만 증여세 면제혜택이 주어져 5억원을 초과할 경우 초과한 금액만큼 세금을 내야 한다. 문제는 5억원 이하를 예치했더라도 원금(일부 또는 전액)을 찾게 되면 이 금액에 대해선 증여세가 부과된다는 점이다. 이는 장애인신탁이 종신상품으로 분류돼 사실상 해지를 못하게 돼있기 때문이다. 가입기간이 10년만 넘으면 대부분 비과세 혜택이 제공되는 보험상품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이자소득세를 내야 하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5억원 이하로 장애인신탁을 가입한다 하더라도 증여세는 면제되지만 이자소득세(15.4%)는 꼬박꼬박 내야 한다.
 
보험업계의 한 관계자는 "고객이 장애인신탁에 5억원을 예치하고 수년 후 모두 찾아갈 경우 증여세 등이 부과돼 약 8700만원을 세금으로 내야 한다"며 "결과적으로는 장기적으로 가입해도 수익률은 마이너스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장애인신탁은 증여세 면제 상품이라기보다는 사실상 세금 부과기간을 일정기간 늦춰주는 것에 불과하다"며 "여기에 매달 받는 수익에 대해서는 이자소득세를 부과해야 하기 때문에 고객들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예금자보호법에 적용되지 않고 이율이 낮은 것도 가입자들을 머뭇거리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장애인신탁은 운용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평균수익률이 연 3~4% 수준이다. 주식과 채권, 펀드 등 투자방식은 다양하지만 지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장애인들을 위해 가입하는 고객들이 많아 리스크를 줄이고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장애인신탁은 일반 예·적금과 달리 예금자보호법을 적용받지 않는다"면서 "원금보장이 되지 않아 가급적 안정적으로 운용해달라는 요구가 많다"고 설명했다. 
'팔·다리 못 되는' 장애인신탁

 
◆금투협, 3가지 개선방안 제안

이처럼 금융권의 장애인신탁 실적이 저조하자 금융투자협회가 팔을 걷어붙였다. 금융투자협회는 6월 중순 은행과 보험, 증권사 등의 입장을 모두 수렴해 장애인신탁 규제완화를 요구하는 내용을 기획재정부에 전달했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오래 전부터 금융권에서 장애인신탁 규제완화를 요구해옴에 따라 기획재정부에 의견을 전달했다"면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정부가 일정부분은 수용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투자협회가 제안한 개선방안은 크게 3가지다. 비과세 가입한도를 5억원에서 8억원까지 높여달라는 의견과 장애인들의 교육비, 치료비 등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서는 원금을 찾아도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또 이자소득세 면제 등도 포함됐다.
 
금융권 관계자는 "장애인신탁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기 위해 출발했음에도 현재 운용되는 상품을 보면 장애인을 배려하는 내용이 거의 없다"며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장애인 전용 상품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늦어도 7~8월 중 세제혜택 규제완화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현재 금융투자협회에서 장애인신탁에 대한 의견을 접수받았다"며 "결과는 아직 이야기할 수 없지만 시기는 대략 7~8월 중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세제와 관련된 부분이 많아 여러가지 복잡한 사안들이 많다"며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측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3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