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삼성가 장손' 해법은…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가슴 깊이 사죄합니다."

불법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이재현 CJ그룹 회장(53)이 지난 3일 전 임직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검찰의 그룹 압수수색이 진행된 지 2주만의 일로, 이후 이 회장은 임직원 가족들에게도 친필서명이 담긴 사과 편지를 발송했다.

CJ의 탈세 혐의에서 시작된 검찰 수사가 최근 이 회장의 해외비자금 조성과 운용, 비자금을 동원한 그룹 지배력 강화, 주가조작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정부의 강력한 경제민주화 '칼날'이 일부 대기업의 오너를 잇따라 겨냥하고 있는 상황에서 CJ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창사 이후 최대의 위기상황에 처한 셈이다.
 
재계는 그룹의 총수로 유독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던 이 회장이 좌초된 'CJ호'를 다시 일으켜 세울 복안이 있을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법의 심판대에 올려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이 그룹 총수 자리를 내놓으며 백의종군한 것처럼 이 회장 역시 같은 행보를 보일 것인지에도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다.
 
◆굴곡진 인생…성장통 겪으며 그룹 키워내

경영자 인생 최대의 위기에 처한 이재현 회장은 그의 '성장이력' 자체에 굴곡진 사연들을 여럿 안고 있다.

한국 최대기업인 삼성가의 장손이었음에도 그의 삶이 결코 순탄치 않았던 것은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맏아들인 아버지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82)이 그룹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게 발화점이 됐다.

이 회장은 이후 지분정리를 통해 1996년 5월 삼성으로부터 제일제당을 분리·독립시키는데 성공하며 CJ그룹의 전신인 제일제당그룹을 이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계열분리작업 때 표면화됐던 삼성과 CJ간 불협화음은 그동안 잠잠하다 지난 2011년 대한통운 인수과정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CJ가 삼성증권을 대한통운 인수자문사로 선정한 상황에서 삼성SDS가 뒤늦게 포스코와 손잡고 인수전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CJ는 삼성증권 자문계약을 철회하는 등 삼성에 맞섰고, CJ가 대한통운을 품에 안은 상황에서 삼성도 CJ에 맡겨왔던 해외물류 물량을 빼내는 등 양사간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작년 2월에는 삼성의 이재현 회장 미행사건이 발생하면서 삼성-CJ간 대립국면이 또 만들어졌다. 특히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그의 동생인 이건희 삼성 회장을 상대로 낸 상속 소송과 연관된 사건이어서 재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현재 이 회장을 겨냥한 검찰의 수사 칼날이 비자금 조성 쪽으로 몰려있지만 지난 2008년에도 이 회장은 비슷한 혐의로 고초를 치른 바 있다. 

당시 CJ그룹의 자금관리인 A씨는 이 회장의 차명재산을 빼돌리고 돈을 투자했다 날리자 살인을 청부한 혐의 등으로 기소됐다. 하지만 A씨는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 회장은 문제의 차명재산을 실명으로 전환하면서 세금 1700억원을 자진 납세했다. 

최근 검찰은 이번 비자금 수사와 관련, 수백개의 새로운 차명계좌를 발견해 2008년 당시 신고한 차명계좌와 별개인지 확인하고 있다. 
 
◆난파 위기 'CJ호' 구할 묘수는
 
이 회장은 순탄치 않았던 경영행로에도 불구하고 삼성그룹 분사 이후 하나의 계열사에 불과하던 제일제당을 재계 14위의 대기업으로 키워냈다. 사업구조에 있어 기존 식품·식품서비스 중심에서 ▲바이오·생명공학 ▲엔터테인먼트·미디어 ▲물류·신유통 등을 추가하며 4대 사업군 체제를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거침없는 인수합병(M&A) 행보 등을 통해 성장한계에 부딪힌 CJ의 영역을 미디어, 물류, 홈쇼핑 사업 등으로 확장해 냈다. 2000년까지 CJ개발, CJ시스템즈, CJ엔터테인먼트, CJ CGV, CJ미디어, 드림라인, CJ투자증권, CJ GLS, CJ푸드시스템, CJ홈쇼핑 등이 그룹 계열사로 자리잡았다.
 
2000년 이후에도 이 회장은 미디어분야에 초점을 맞추며 전국의 유력 종합유선방송사업자(SO)를 잇따라 인수하는 등 케이블TV업계의 큰손으로 성장했다. 이어 2011년 M&A시장의 최대어로 불리는 대한통운마저 인수해 '물류업계 1위'로 단번에 올라서기도 했다.
성장가도를 달린 CJ그룹은 1995년 매출 1조7300억원에서 지난해 매출 26조8000억원을 돌파하며 20년도 안되는 기간 동안 15배 넘는 급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사이 이 회장은 최근 검찰발 '비자금 파문'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난파 위기에 몰린 'CJ호'의 갑판을 힘겹게 지키고 있다. 2008년과 2009년에도 비자금 조성 혐의로 검찰수사를 받은 적이 있지만 이번에는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 역외탈세, 편법증여 등 다양한 혐의가 걸려있어 '위기 탈출'이 현실적으로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올 들어 주요 계열사들의 실적부진까지 겹치면서 이 회장의 머리는 더 복잡해졌다.
 
글로벌경기 침체와 내수 부진의 영향으로 제일제당을 비롯한 주요 계열사들은 현재 고전의 시기를 걷고 있다. 그룹 매출의 3분의 1을 담당하는 주력회사인 CJ제일제당만 해도 올 1분기 영업이익이 작년 동기대비 11.8% 줄었다. 2011년 말 인수합병을 통해 자회사로 편입한 물류회사 CJ대한통운을 합하면 영업이익 감소 폭은 21%에 달한다.
 
동반성장 이슈로 CJ푸드빌, CJ프레시웨이 등의 출점이 제한된 것도 이 회장의 어깨를 무겁게 하고 있다. 비록 지난 5월18일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고 내핍경영에 들어갔지만 쉽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쪽에선 속도를 내고 있는 검찰 수사가 장기화될 경우 '매출 30조원'을 목표로 내걸며 성장가도를 달려온 CJ에겐 두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만큼의 '치명타'가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섞인 전망도 나온다.
 
올해로 창립 60주년을 맞게 된 CJ그룹. 백의종군에 나선 최태원·이호진 회장의 경우처럼 '비운의 황태자' 이재현 회장이 CJ를 살릴 묘수는 어떤 것일지에 재계의 관심이 모아지는 시점이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