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전세살이
경기도 수원시 전용면적 84㎡ 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회사원 김형수씨(42)는 요즘 혼란스럽다. 자신 있게 설계했던 '전세살이' 전략에 차질이 생겨서다. 2년 전 그는 약간의 빚을 내면 집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집값 하락을 예상하고 전세를 택했다. 그가 구한 집에는 선순위 대출이 있었지만 전세보증금을 되돌려 받는 데 별다른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그동안 아파트값은 5000만원이 떨어졌고, 그는 집을 사지 않은 자신의 판단력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던 찰나, 살고 있는 아파트가 경매에 부쳐진다는 날벼락 같은 소식을 접했다. 그가 사는 아파트의 경우 매매가격은 떨어지고 전세가격은 치솟으면서 전세가율이 80%에 달하는 곳이다. 김씨는 이제 전세보증금이나 제대로 챙겨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요즘 주위를 둘러보면 김씨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수많은 세입자들이 집값이 떨어질까 겁이나 집을 사지 않고 전세로 눌러 산다. 세입자들은 전세살이를 집값 하락의 위험을 회피하는 안전자산 구매행위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는 집주인의 부실이 세입자에게 거의 전가되지 않는 월세살이에서나 가능한 얘기다. 집값 하락기에 전세구매는 또 다른 위험자산을 구매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전세는 주거공간을 매개로 한 집주인과 세입자간의 채권·채무관계다. 세입자는 집주인에게 채권자, 반대로 집주인은 채무자가 된다. 사실 세입자는 이자 대신 공간을 이용하는 대가로 돈을 무이자로 빌려준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아무에게나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돈을 빌려줄 때 빚을 제대로 갚을 지 위험을 꼼꼼히 따진다.

그런데 요즘 전세를 찾는 사람들은 집값 하락 위험을 고려할 뿐 채무자의 빚 상환 불능이라는 위험에 대해서는 덜 신경 쓰는 것 같다. 전세금 지불행위가 사금융 형태의 '대부'(loan)라는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요즘은 수도권 지역에서도 전세가격이 매매가격을 웃도는 아파트단지가 등장하고 있다. 이는 은행으로 치면 세입자가 LTV(담보대출인정비율)를 초과해서 집주인에게 대출해준 것과 같다. 전세가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세입자입장에서는 전세보증금을 떼일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다.

부동산태인에 따르면 올해 수도권에서 임차인이 있는 주택이 경매에 부쳐질 경우 5명 중 4명 꼴로 보증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돌려받지 못했다. 이런 불행한 세입자가 올 들어 5월까지 4000명을 넘어섰다.

앞으로 집값 하락세가 계속되면 세입자에게 불똥이 튀는 사례가 더 늘어날 것이다. 우리나라 매매시장과 전세시장은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특성이 있으므로 '깡통주택'이 '깡통전세'로 쉽게 이어진다. 전세가 여전히 임대차의 절반정도를 차지하는 현실에서 집주인의 불행은 세입자에게도 불행이 된다. 때문에 전세 거주자와 집주인은 싫든 좋든 공동 운명체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 주택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만큼 거품을 확 빼야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집값의 70~80%를 보증금으로 맡긴 채 가슴 졸이며 살고 있는 전세거주자를 생각한다면 무책임한 말이다. 거품이 갑자기 꺼진다는 것은 전세보증금이 공중 분해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입자의 주거안정을 위해서라도 주택시장은 경착륙보다 연착륙이 필요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9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