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나라를 거지로 만드는(begger-thy-neighbor) 정책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지난해 일본의 통화정책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한 말이다.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일본 자민당이 "윤전기로 돈을 찍어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선언한 데 대한 경계인 것. 다른 나라의 수출경쟁력을 약화시켜 피해를 준다는 우려가 담겨있다. 전 세계 경제가 하나로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 환율은 '총성 없이' 다른 나라의 부를 빼앗을 수 있는 위협적인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약 1년 후인 2014년 새해 벽두부터 '엔저'(円低)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엔/달러 환율이 105엔을 넘어서며 '제2차 엔저 공습'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외국인이 많이 찾는 일본 마트 ‘이온몰’ 계산대에 엔달러 환율이 공지된 모습(사진=머니투데이 DB)
외국인이 많이 찾는 일본 마트 ‘이온몰’ 계산대에 엔달러 환율이 공지된 모습(사진=머니투데이 DB)

◆ 엔저 폭격의 불편한 진실

지난해 일본정부는 무제한 양적완화의 방아쇠를 당겼다. 일본은 지난해 세계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일본이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는 문장을 합의문에 담았다. 국제사회가 '엔저 폭격'을 용인한 것이다. 이는 동맹국인 일본을 지렛대 삼아 경기회복의 불씨를 지펴보려는 미국이 사실상 일본의 손을 들어준 것. 그간 미국이 생사를 걸고 치열한 환율전쟁을 펼쳐온 중국을 견제하는 의미도 담겼다.

지난해 1분기 '엔저 1차공습' 당시 원/엔 재정환율은 100엔당 1240원대에서 1170원대로 70원 이상 급락했다. 지난 3월에는 1120원대로 밀리기도 했다. 환율이 시장의 원리가 아닌 강대국들의 이해 잣대로 요동치면서 그 사이에 낀 신흥국들이 환율 리스크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우려스럽게도 한동안 잠잠하던 '엔저 폭격'이 연말연시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새해 첫 거래일인 지난 2일, 국내 금융시장은 '주가·환율·금리'가 모두 요동치는 벼락을 맞았다. 코스피지수가 전 거래일에 비해 2% 넘게 급락하며 1960선까지 밀렸고, 엔/달러 환율은 105엔을 넘어서며 장중 한때 4년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 가운데 외국인들은 국채선물(3년 만기 1만618계약 순매도)을 내다팔기 바빴다.

일본경제의 재건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일본정부가 다시 엔저 화살을 당긴 것이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물가상승률이 2%에 안착할 때까지 확장적 통화정책을 계속하겠다"고 시사한 데 기인한다.


정정희 신한은행 PWM파이낸스센터 PB팀장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엔저를 용인하는 상황이어서 2014년 엔저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진=뉴스1 양동욱 기자
사진=뉴스1 양동욱 기자

◆ 엔저 공습 어디까지
 
엔화 약세는 당분간 거스르기 힘든 대세다. 시장에서는 최소한 올해에는 엔화 약세가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구로다 총재는 "상황에 따라 2015년까지 금융완화 기조를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분수령은 오는 2분기다. 일본은 오는 4월 소비세 인상(5%→8%) 이후 경제성장률이 급락할 경우 곧바로 추가 양적완화를 단행할 방침이다. 일본의 소비세 인상은 2014년 일본 경제성장률을 0.9~1.9%포인트 떨어뜨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기획재정부는 최근 발표한 '2014년 경제정책방향'에서도 이러한 엔저를 주요 대외 위험요인으로 지목했다. 기재부는 "일본정부의 추가 양적완화 가능성이 커서 대일(對日)뿐 아니라 주요 수출시장서도 경쟁이 심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로이터통신은 연내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08엔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고, 도이치은행은 115엔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원/엔 환율 1000원선 붕괴'다. 원/엔 환율은 새해 첫 거래일부터 100엔당 1000원선을 깨고 900원대로 떨어졌다.

'1차 엔저 공습' 때보다 주목해야 할 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해 원/엔 환율은 100엔당 1200원대에서 1100원대까지 하락한 것인 반면, 이번에는 수출경쟁력의 마지노선으로 알려진 원/엔 환율 1대 10의 관계가 붕괴된 것이다.


円에 떨고 있는 '메이드인 코리아'…원低 잊어라

현대경제연구원이 최근 펴낸 '원/엔 환율 1000원선 붕괴의 의미와 국내 경제 파장'에 따르면 원/엔 환율이 2014년에 연평균 1000원 수준일 경우 철강 -3.5%, 기계 -3.2%, 자동차 -3.2%, 석유화학 -3.1%가량 수출이 감소할 것으로 예상했다. 연평균 954원을 기록할 경우엔 철강 -5%, 기계 -4.6%, 자동차 -4.5%가량 수출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더욱이 '원고'와 '엔저'라는 수출 여건상 최악의 환율조합이 전개될 가능성도 짙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 원화는 달러화나 유로화 등에 비해 절하혜택을 과도하게 누려온 것으로 평가된다. 수출기업들이 원저시대는 잊고, 어느 때보다 제품 경쟁력으로 정면 돌파한다는 각오를 다져야 할 때라는 것이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경제동향분석실장은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산업을 중심으로 연구개발(R&D) 지원을 확대하고, 일본과 차별화된 기술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며 "더불어 엔저지속에 따른 중소·중견기업들의 피해가 예상되므로 무역보험공사의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무역보험 및 유동성 지원 등 맞춤형 상품 제공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도 환율 변동을 주시하되, 과도한 반응은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9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엔화 약세는 모든 산업부문에 영향을 끼치기보다는 자동차·철강 등 일부 산업에 영향을 끼친다"며 "한은에서 직접 개입하는 것보다 간접적 대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1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