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LIKE] 관객모독, 모독당할 준비는 필요 없다
이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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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데 지쳐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것을 느끼며 길을 걷고, 자신은 또 누군가의 옷매무새나 몸매를 힐끔거린다. 혹은 뚫어져라 다른 이를 쳐다보며 판단하고, 누군가가 나를 어떻게 판단할지 고민하며 옷을 고르다 약속시간에 늦기도 한다. 하지만 연극 ‘관객모독’은 ‘판단’할 수가 없다.
연극 ‘관객모독’은 가짜 연극도, 진짜 연극도 아닌 반(半) 연극이며, 반(反) 연극이다. 언어연극으로서 무대와 객석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형식의 ‘관객모독’은 배우가 주인공이기도 하고, 관객이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연극이 펼쳐지는 극장 안은 ‘혼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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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작가 페터 한트케(Peter Handke) 원작인 ‘관객모독’은 1978년 국내 초연 이후 꾸준한 재공연과 함께 매번 논란의 중심에 서왔다. 특히 지난 시즌과 달리 더욱 새롭게 단장한 ‘관객모독’은 극단76단의 수장이자, 배우 기주봉의 형이기도 한 기국서가 연출을 맡아 기대를 높였다.
지난 11월 6일, 과연 그들은 누구를, 무엇을 모독하려는 것인지. 뻔뻔하고도 유쾌한 극단76단의 ‘관객모독’ 무대를 찾았다. 모독을 당할 마음의 준비는 필요 없다. 연극 시작부터 관객의 귀에 꽂히는 신랄한 욕이 당신의 뇌와 귀를 깨워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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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 입은 이 시대 ‘미생’들에게 “심판자 노릇하지 마라”
네 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연극의 시작을 알리듯 무대가 암전되자 어디에선가 언어소음과도 같은 욕지거리가 쏟아진다. 갑작스러운 ‘욕’ 대사에 불쾌한 이들도, 놀라는 이들도, 심드렁한 이들도 있다. 불이 켜지자 본격적인 ‘언어유희’가 시작된다.
'관객모독'은 ‘있습’, ‘니다’, ‘연’, ‘극만이’와 같은 언어유희 대사가 8할을 차지한다. “무언가를 기대하려고도 하지 말고 이야기와 갈등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배우들은 바로 정재진, 안병균, 이철은, 박선애였다. 별다른 무대장치나 행동 없이 긴 대사들이 이어진다. 되풀이된다.
“어떠한 인물도 연기하지 않는다. 다른 시간을 연기하지도 않을 것이며, 우리는 통일체다. 심판자 노릇하지 마라.”
이들의 모독은 특이하다. 분명히 언어를 관객에게 던지고 있는데도 말은 온전한 그대로가 아니게 된다. 단어의 연속성과 운율을 가지고 노는 듯했던 배우들은 물 흐르듯 관객을 유입시키고, 관객에 대한 모독을 그치지 않는다.
웃음 포인트도 다양하다. 누군가는 “이곳에 국정원 직원이 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라며 정치를 비판할 때, 어떤 이는 “성기의 위치를 바로 잡아 달라”며 성에 관련된 조롱을 할 때 웃음을 쏟아낸다. 배우들은 연극계, 사회, 관객 등 세상 전체를 비판하지만 유쾌한 기운을 유지한다. 이들의 ‘모독’을 즐겁게 받을 수 있는 부분이다.
연극 속에 연극이 있다. 비로소 시작된 ‘진짜 연극’에서 배우들은 각각의 특정 인물이 돼 어떤 스토리를 연기해 나간다. 대사는 전혀 뜬금없는, 하나같이 되풀이하던 비판과 모독의 연속이지만 묘하게도 신파극 같던 그 스토리는 그들의 표정과 몸짓만 보고서도 결말이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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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근, 관객과의 즉석 수다 “분유 값 벌려면 뭐든 해야죠”
이날 배우들의 트렌디(?)하지 못한 연기를 보며 무대감독 역 양동근이 등장했다. 그는 깜짝 등장해 배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연극배우답게 연기하시라고요!”
양동근 특유의 연기가 연극무대에서 어떻게 비쳐질 지는 상상 그대로였다. 객석과 무대를 넘나들며 즉석 연기를 펼친 양동근은 당혹스러움과 쑥스러움으로 표정과 온몸이 그루브를 탔다.
극단의 배려로 양동근은 예외 없는 관객과의 짧은 토크쇼를 진행했다. 그의 출연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자리한 듯한 팬들이 곳곳에서 질문을 쏟아냈다. 양동근은 자신의 팬들에게 핀잔을 주기도 하고, 농담을 던지기도 하면서 마치 어제 본 친구처럼 관객과 마주했다.
양동근은 솔직하고도 털털했다. 다음 음반을 기다리고 있다는 관객의 질문에 그는 “쓸 가사가 없다”고 답했고, 랩을 들려 달라는 관객의 주문에 “나는 프리스타일 못한다”고 시크하게 응수했다. 이제 막 20개월에 접어든 ‘아들 자랑’도 빼놓지 않았다.
선후배를 자극하는 배우 양동근의 대표작, MBC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에 관한 질문도 쏟아졌다. 어느 한 관객은 극중 배우 신구와 양동근이 연기한 장면을 돌려보고 또 돌려본다며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양동근은 “그 작품, 그 연기는 너무 높다. 이제 그런 연극은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힘이 안 된다. 하지만 너무 좋은 작품이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양동근에게 가수 혹은 배우, 어떠한 무대에서 그를 만날 수 있는지 질문이 던져졌다. 그는 “가수로든 배우로든, 한 분야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도 있다. 언제부턴가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내 자신이 셀러브리티 같았다. (그 스포트라이트의 매력이란...크) 하지만 분유 값 벌려면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라고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그러고 나서 양동근은 객석에 앉아 관객들과 함께 연극을 즐겼다. 또한 틈틈이 배우들의 요청에 따라, 관객의 요청에 따라 무대에 서며 즉흥 연기를 선보였다. 배우들의 귀를 깨물거나, 신명(?)나게 거리를 떠도는 사람을 연기하기도 했다. 역시 그가 연기하는 배역은 모두가 양동근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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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무대에서 관객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나?
이철은 : 생소하다. 무대와 객석 사이의 벽을 깨고 직접 교감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신기하고 낯설다.
안병균 : 배우와 관객의 입장이라기보다 ‘관객모독’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사이가 맞는 것 같다. 그저 말을 주고받는 것이다.
Q. 기억에 남는 관객이 있나?
정재진 : 참 다양하다. 연극 내 삽입된 연극을 연기할 때는 관객들이 스토리를 만들어 간다. 사람을 죽여야 하는 때에 이르면 이 사람을 어떻게 죽이는 게 좋을지 관객들에게 묻는다. 전기톱으로 잘라라, 뽀뽀해라, 발 냄새로 죽여라 등등 참 다양한 의견들이 쏟아진다. 오늘은 내 흰 머리를 뽑으라고 해서 당황했다. (허허)
박선애 : 뽀뽀를 해달라며 입술을 들이미는 장면이 있는데 객석을 무대로 모셔서 함께 한다. 어떤 분은 정말로 뽀뽀를 하시더라. (하하)
Q. 대사가 길고 많다. ‘언어연극’의 힘든 점은 무엇인가?
정재진 : 연습을 많이 하고 오르는 무대임에도 대사가 힘들다. 적어도 무대에 보름은 올라가야 대사를 자유롭게 하고 언어를 가지고 놀 수가 있다.
Q.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이철은 : 대사 하나하나의 의미가 다 와 닿기 때문에 어느 한 명대사를 뽑을 수 없을 정도다. 무방비 상태로 와서 대사를 새기면서 연극을 즐기길 추천한다.
Q. ‘관객모독’을 추천한다면?
정재진 : ‘관객모독’은 별미다. 늘 삼겹살만 먹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은 소고기도 먹고, 신선한 연극도 즐기고. (흐흐)
박선애 : 이런 대사가 있다. ‘(이 연극은)서두에 불과하다’라는 말이라면 ‘관객모독’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안병균 : 우리는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Q. ‘관객모독’은 가짜 연극인가, 진짜 연극인가?
정재진 : 반(反) 연극이다. 고정 관념을 파괴하는 연극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늘 깨어있기를 주문한다.
◆‘관객모독’을 보기 위한 관객의 자세
‘가급적 정장을 입고 오십시오’라고 강조한 ‘관객모독’은 서울 대학로 <대학로극장>에서 오는 2015년 1월 4일까지 계속된다. 선입견을 깨고 싶거나, 시원하게 욕 한 번 못하는 일상이 답답하다면, 혹은 시원한 물세례를 받고 정신을 차리고 싶거나 신선한 충격을 받고 싶은 이라면 오늘 ‘관객모독’을 당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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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연극 ‘관객모독’, 극단76, 이다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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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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