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구 전 한국씨티은행장이 지난 1일 공식 취임식을 갖고 제12대 은행연합회장 자리에 올랐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금융노조)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 신임 회장은 지난 11월28일 이사회와 총회에서 단독 후보로 추천돼 만장일치로 선임됐다. 그의 임기는 3년이다.

금융권에선 그의 은행연합회장 선임을 두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금융당국의 힘을 빌어 현재의 자리에 올랐다는 시각이 지배적인 만큼 앞으로 금융당국을 상대로 은행권의 입장을 대변할 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 우려스럽다는 반응이다. 비주류인 외국계은행 출신이 은행권을 대표하는 협회장 역할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 회장은 이를 의식한 듯 취임식에서 금융당국과의 선긋기에 나섰다. 그는 "불필요한 규제를 없애고 은행권과 관련된 법률을 제·개정하는 과정에서 은행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금융소비자보호를 위해 금융당국이 최근 은행규제 강화에 나선 상황인데 은행연합회가 이에 맞서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최근 고꾸라진 수익기반 확대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하 회장은 "지난 2011년 이후 국내 은행의 수익률이 50% 감소하고 성장동력이 약화되고 있다"며 수수료 수익기반 확대와 세계시장 진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최근 은행의 통장 무단인출 및 보이스피싱 등 금융사기가 잇따르고 있는 데다 금융소비자보호가 강화돼 금융수수료를 섣불리 올렸다간 오히려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또한 글로벌시장 진출 역시 수년 전부터 정부 차원에서 필요성을 제기했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실정이어서 그의 발언이 형식에 불과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사진제공=은행연합회
/사진제공=은행연합회

◆'신종 금융관치' 논란 거세

하 회장이 은행연합회장으로서 내세운 청사진은 '마부위침'(磨斧爲針)이다. 마부위침은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끈기와 인내로 끊임없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울러 하 회장은 "은행들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연합회가 앞장서서 사원은행의 눈높이와 시각에서 협력하고 정책당국과 소통하며 다각적인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부위침은 하 회장의 선임 배경과 많이 닮았다. 하 회장은 취임 전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는 20년 이상 몸담았던 한국씨티은행에 돌연 사의를 표하고 KB금융지주 회장 자리에 도전했다. 당초 금융권에선 다크호스로 등장한 그가 차기 회장에 오르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하지만 낙하산 논란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면서 결국 윤종규 현 KB금융 회장에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후 은행연합회장 하마평에 오르더니 이사회 구성원들의 의견수렴도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금융당국발 내정소식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난 11월28일 이사회는 총회를 열고 하 회장을 차기 회장으로 추대했다.

당시 이사회는 총회를 은행회관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금융노조의 강한 반발로 하 회장을 비롯한 이사회 구성원인 은행장들이 회의장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은행회관에서 쫓겨난 이들은 롯데호텔에서 총회를 열고 그를 차기 회장으로 선택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금융노조가 반대한 하 회장은 관피아나 모피아가 아닌 순수 민간출신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금융노조는 그의 선임을 곱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월호 사태 이후 금융당국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관료를 내려 보내지 못하자 민간출신으로 하 회장을 선택했다는 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신종 관치금융'에 적합한 인물로 그가 낙점됐다는 의미다.

금융노조 측은 "전국민을 기망해 이뤄진 사상 최악의 관치 낙하산 인사로 규정한다"며 "감사원에 이번 사태와 관련한 공익감사를 청구하는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관치 낙하산 인사의 책임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관철시키겠다"고 밝혔다.

◆오명 벗고 대국민 신뢰회복 앞장서야

하 회장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중 첫번째는 '신(新) 관치'라는 오명을 벗는 일이다. 민간출신이 은행연합회장에 오른 것은 옛 한미은행 출신인 신동빈 전 회장 이후 11년 만에 처음이다. 은행연합회 설립 이후 역대 세번째다. 선임과정이 어찌됐든 민간출신이 계속 배출되고 긍정적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능력으로 평가받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묘책이 없다.

아울러 추락할 대로 추락한 은행의 신뢰도를 끌어올려야 한다. 강력한 내부통제로 금융사고를 예방하고 고객이 마음 편히 은행거래를 할 수 있는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또한 은행들이 어려운 외부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도 고안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는 물론 금융당국과 맞서 은행의 이익을 대변하고 실익을 챙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금융당국의 놀이터가 된 금융지주 회장을 비롯해 은행장 인사정책시스템도 하 회장이 개선해야 할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하 회장은 취임식이 끝난 직후 기자들과 만나 "35년 동안 은행업에서 경험을 쌓았고 행장 경력도 14년이다. 역대 회장 중에선 은행산업을 제일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을 둘러싼 낙하산 논란에 섭섭함을 털어놓았다.

앞으로 남은 3년 동안 과연 누가 더 섭섭해 할지는 순전히 그의 몫이다. 다만 그의 임기가 끝났을 때 금융당국보다 은행권이 덜 섭섭해 하기를 바란다.

☞ 하영구 회장 프로필
▲1953년 전남 광양 출생 ▲경기고 ▲서울대 무역학 학사 ▲씨티은행 서울지점 ▲씨티은행 자금담당 총괄이사 ▲한미은행장 ▲금융발전심의회의 은행분과위원회 위원 ▲씨티은행장 ▲한국씨티금융지주 회장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6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