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아 <머니위크>가 준비한 특집기획. 이번엔 우리 서민들의 삶과 추억, 낭만과 애환이 깃든 전통시장이다. 그것도 그냥 전통시장이 아닌, 대형마트의 공세 속에 변신을 통해 사람들의 발걸음을 다시 시장으로 돌린 매력이 ‘철철’ 넘치는 시장을 소개하는 <전통시장의 재발견>이라는 주제다.이 중 기자에게 전통시장을 탐방하라는 취재지시가 떨어졌다.


하지만 걱정이 앞섰다. 시장을 제대로 구경해본 적도, 시장에서 장을 본 적도 없는 기자에게는 너무 낯선 주제여서다. 결국 인터넷의 힘을 빌려 이것저것 알아보며 시장에 대한 기본상식을 익히고 특색 있는 시장을 알아본 후 취재 동선을 정했다.
  
여기에 하나 더 ‘워킹투어’라는 테마를 입혔다. 이렇게 탄생한 기자의 전통시장 탐방코스는 종로구 효자동 ‘통인시장’→ 중구 황학동 ‘동묘 벼룩시장’ → 종로구 종로5가 ‘광장시장’으로 이어졌다.

이에 맞는 코스별 시간도 정했다. 우선 첫번째로 갈 ‘통인시장’은 정오 12시. 이곳에서 시장을 둘러보며 점심을 해결할 요량이다. 다음 목적지는 ‘동묘 벼룩시장’. 오후 2시~2시30분 도착 예정이다. 거리상으로는 통인시장 다음이 광장시장이어야 하지만 광장시장의 먹자골목을 둘러보기 위해 조금 참기로 했다. 대신 동묘 벼룩시장에서 활기찬 상인들의 목소리와 풍성한 볼거리를 기대했다. 마지막은 ‘광장시장’. 이곳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 마약김밥과 육회 그리고 빈대떡 등을 기대하며 오후 5시30분~6시로 도착시간을 정했다.


출발일은 지난 3일. 오랜만에 구두를 벗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옷도 정장이 아닌 편안한 면바지에 헐렁한 티셔츠, 두툼한 점퍼를 걸쳤다. 탐방준비 끝. 올해 7살 된 딸에게도 시장을 구경시켜주고 싶어 어린이집에서 딸아이를 데리고 나와 출발했다.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 통인시장 = 마음과 입맛을 훔치다

오전 11시30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2번 출구로 나와 자하문로라는 도로명 길을 따라 10분가량 걸으면 ‘통인시장’이라고 써있는 간판과 약간은 어두침침한 시장 입구가 나타난다.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시장으로 들어선 순간, 왁자지껄한 시장풍경에 다소 어안이 벙벙했다. 평일이라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기자의 생각이 빗나간 순간이었다. 점심시간인 탓에 주변 직장인들과 젊은이들이 식사를 하러 시장으로 몰려든 모양이다. 행여 딸아이의 손을 놓칠새라 손을 더욱 움켜쥐고 수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

통인시장은 하나의 골목이 직선으로 길게 이어진 전형적인 골목장이다. 70여개의 점포가 영업 중인데 갖가지 반찬을 판매하는 반찬가게를 비롯해 떡, 생선, 김구이, 떡볶이 가게 등이 좁은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딸아이는 이런 가게가 신기한지 바라보느라 정신이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검정색의 일회용 도시락 용기를 들고 좁은 시장통을 분주히 돌아다녔다. 음식을 도시락에 담는 사람들은 맘에 드는 반찬을 담을 때마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반찬을 파는 상인들은 반찬을 담아 줄 때마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손을 잡고 있던 딸아이가 재촉하기 시작했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메추리알 장조림과 소시지 등이 눈에 보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딸아이가 화내기 전에 빨리 도시락 통을 사야 할 상황. 손에 도시락을 들고 있는 한 여학생에게 도시락 통은 어디서 구하는지 물었다.


“(옆 건물 2층을 가리키며) 저기에 올라가서 엽전을 사면 일회용 도시락 통을 줘요.”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건물 2층으로 올라갔다. 좁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2층 내부에서 3층으로 이어진 이곳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촘촘히 자리 잡고 있었다. ‘도시락 카페’였다.

이미 많은 이들이 도시락을 즐겁게 먹고 있었다. 이곳에서 엽전을 사며 이용방법을 물었다. 직원은 “여기서 엽전을 사면 되는데 엽전 1개당 500원이다. 엽전으로 시장을 돌아다니며 먹고 싶은 반찬을 사면 된다. 밑반찬은 대부분 엽전 1개, 고기나 전 종류는 엽전 2~4개가 필요하다. 반찬을 다 고르면 여기로 와서 밥과 국을 각각 엽전 1개씩으로 구입해 먹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설명을 듣고 엽전 20개를 구입했다. 엽전을 손에 쥔 딸아이는 마냥 신기한 듯 엽전을 바라보며 신나했다. 본격적으로 반찬 쇼핑에 나섰다. 딸아이와 기자는 각자 먹고 싶은 반찬을 정신없이 구입했고 그때마다 딸아이가 반찬값을 자기가 내겠다며 흥을 냈다. 이런 딸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장조림을 판매한 할머니는 “많이 먹고 튼튼히 커서 아빠 맛있는 거 많이 사줘”라며 덤으로 옆에 있던 소시지도 얹어줬다.

그러자 딸아이는 한껏 신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 할머니 최고”를 외쳤다. 비단 이 할머니만이 아니다. 통인시장에서 장사하는 상인들 모두 후한 인심과 웃음으로 우리 부녀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어느 정도 반찬을 구입하고 카페로 올라가려는 순간 한 가게에 유독 길게 늘어선 줄이 눈에 띄었다. 이 시장의 명물인 기름떡볶이 가게였다. 그 맛을 놓칠 수 없었던 우리는 결국 떡볶이도 구입했다. 기자는 고추장떡볶이, 딸아이는 간장떡볶이를 골랐다.

이후 카페에 올라가 남은 엽전으로 밥과 국을 구입해 식사를 했다. 평상시 밥을 잘 먹지 않던 딸아이는 정신없이 먹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빠, 완전 맛있어!” 사실 추운 날씨에 음식이 식어 기자는 큰 감동을 느끼지 않았지만 딸아이는 맛있었나 보다. 아마도 통인시장 상인들의 후한 인심과 인상, 그리고 그들이 시장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 도시락이라는 무기를 장착하기까지의 노력의 맛이 아닐까 싶다.

딸아이가 먹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아이가 커서 전통시장을 갈 때쯤엔 지금을 떠올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할 무렵 딸아이가 말했다. “아빠, 우리 내일 또 여기서 밥 먹자.” 맛있는 식사를 마친 후 다른 시장 취재를 위해 아쉽지만 딸아이와의 데이트는 여기서 마치기로 했다. 딸아이를 다시 어린이집에 데려다 준 후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 동묘시장 = 향수 자극하는 추억박물관

딸아이를 데려다 주느라 당초 계획한 워킹투어에 차질이 생겼다. 시간관계상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탔다. 약 30분이 걸려 두번째 행선지 동묘시장에 도착했다. 이때 도착한 시간이 2시40분. 딸아이와의 데이트에 너무 빠져있었던 탓이다.

입구에서 바라본 ‘동묘 벼룩시장’은 진짜 기자가 생각하던 벼룩시장의 모습 그 자체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온갖 물건이 펼쳐져 있었고 가운데 도로에는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이 정신없이 물건을 고르고 흥정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무더기로 쌓인 옷가지의 정중앙에 선 판매상은 “한벌에 2000원. 잘만 고르면 보석을 찾을 수 있다”며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의 특징은 ‘노인들의 홍대’라는 별칭에 걸맞게 대부분 50대 이상의 어르신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젊은이를 비롯한 외국인관광객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곳을 찾은 한 외국인 커플은 “꼭 한번 한국의 전통시장을 구경하고 싶어 찾아왔다. 너무 재밌고 신기한 물건이 많은데 가격도 저렴해 벌써 이 만큼이나 샀다”며 양손에 쥔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가격도 부담 없겠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기자도 2000원에 티셔츠 한벌을 구매했다. 깨끗해 보이진 않았지만 구제 청바지 위에 걸쳐 입으면 제법 잘 어울릴 듯했다.
이곳에는 옷 외에도 이쑤시개부터 도로 공사용 측정기까지 없는 물건 빼고는 다 있다. 아주 어릴 적 할아버지 집에서 보던 라디오나 TV도 눈에 띄었고 매우 촌스러운 코트도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한 가판에는 단추만 수북이 쌓여 있기도 했고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신는 브랜드 운동화도 이곳 벼룩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풍경을 구경하며 천천히 걷자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70~80년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오후 4시50분. 정신없이 동묘 벼룩시장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꽤나 흘렀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상황. 많이 걸은 탓인지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지만 재빨리 마지막 목적지인 ‘광장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사진=임한별 기자

◆ 광장시장 = 우리나라 최고 음식백화점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광장시장. 이곳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모락모락 김을 내뿜는 두툼한 순대, 무 생채, 상추, 시금치 등 다양한 채소를 곁들인 보리비빔밥, 침샘을 자극하는 큼직한 족발까지.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음식들로 시장 통로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한 기자. 지글지글 기름에 튀겨지는 빈대떡 집에서 발을 멈췄다.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는 젓가락이, 입에는 빈대떡이 들어가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우면서 약간은 까칠한 느낌. 간장과 어우러져 적당히 간이 밴 이 맛. 음미할 시간도 없이 기자 앞에 놓인 빈대떡이 사라졌다.

그래도 허기가 진 기자는 맛집을 찾아 다녔다. 하지만 이내 알게 된 사실. 광장시장 먹자골목에서 유명한 집, 맛집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 서민의 음식이 시장통에서 명맥을 유지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졌고 외국관광객에게도 알려진 경우다. 가격이 싸고 양이 푸짐하며 아직도 손맛이 남아 있는 음식들이 주종목을 이루는데 몇몇 유명한 집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가게가 비슷한 음식을 비슷한 가격에 팔고 있었다.

광장시장의 명물로 불리는 마약김밥을 맛봤다. 30년째 이곳에서 김밥을 팔고 있다는 김덕례 할머니(79)와 두 딸이 같이 운영하는 한 마약김밥가게. 매스컴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가게는 아니지만 광장시장은 어디나 맛있으니까 인상 좋은 할머니가 쉴 틈 없이 만드는 김밥가게에 자리를 잡았다. 김밥을 시켜 놓고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김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후에도 기자의 식성은 이성을 잃었다. 광장시장의 명물 ‘동그랑땡’이라고 불리는 돼지고추장구이를 비롯해 신선하고 고소한 육회, 먹음직스러운 왕순대 등이 기자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취재를 마치고 <머니위크> 식구들을 위해 약간의 김밥과 빈대떡을 사들고 시장 뒷편으로 나와 청계천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다소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이날 하루 종일 ‘전통시장’에서 받은 정 때문인지 춥지가 않았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설 합본호(제370·371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