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개 깔아야 되는 '2000억짜리' 홈택스
정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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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체 몇개를 깔란 얘기야?” 지난 2월24일 국세청 홈페이지를 찾은 유병민씨(32)의 이마에 잔뜩 주름이 새겨졌다. 서비스 이용에 앞서 유씨가 설치해야 하는 보안 관련 프로그램만 15개에 이르렀던 것.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씨가 ‘필수’로 PC에 깔아야 하는 프로그램은 9개, 옵션(선택)으로 설치해야 하는 프로그램은 6개였다. 설치를 하기도 전 개수에서 압도당한 유씨는 침착하게 ‘전체설치’를 클릭하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하지만 다운로드 도중에도 수차례 ‘국세청과 연결된 웹브라우저를 모두 닫고 다시 국세청 사이트에 접속’하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화가 난 유씨는 국세청에 항의전화를 걸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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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세청이 국민의 이용편의를 위해 지난 2월23일 새롭게 선보인 ‘차세대 홈택스’가 이용자들의 불만을 사고 있다.
차세대 홈택스는 기존 홈택스와 전자세금계산서(e-세로), 연말정산간소화, 현금영수증, 근로장려세제(EITC), 공익법인공시, 국세법령정보, 고객만족센터 등 8개 민원사이트에서 별도 운영하던 시스템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이용자들은 한번의 로그인으로 세금신고는 물론 민원증명 발급, 현금영수증 사용내역 조회와 전자세금계산서 발행 및 조회 등 국세와 관련된 모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국세청은 새로운 홈택스에 대해 “국민 한명 한명에게 쉽고 편리하게 다가가는 초일류 전자세정”이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이용자들의 체감은 이와 크게 다르다. 유씨처럼 서비스 이용을 위해 들어간 새로운 홈택스 홈페이지에서 무려 15개에 달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란 공지를 보고 황당함을 금치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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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국세청 홈페이지 화면 캡처. |
◆‘간편’ 홈택스? 설치만 15개
국세청에 따르면 환급금 조회 등 일부 서비스를 제외하면 공인인증서 로그인 없이 홈페이지 내 서비스 이용이 불가하다. 최근 다수의 이용자들이 불만을 토로한 국세 환급금 역시 조회 이후 환급 등의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공인인증서 로그인이 필수다.
실제 기자가 홈택스 홈페이지를 이용해 본 결과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위한 과정은 간단하지 않았다.
처음 국세청 홈페이지에 접속한 시간은 오전 10시25분. 홈택스 접속 후 ‘환급금 상세조회’란을 클릭했다. 클릭 후 ‘공인인증서 로그인이 필요하다’는 공지가 떴다. 로그인을 누르자 ‘통합설치 프로그램안내’로 페이지가 넘어갔다. 해당 페이지에는 ‘납세자개인정보 및 정보보안을 위해 보안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한다’는 경고문구가 떴다.
▲공인인증서 ▲개인PC보안 ▲키보드보안 ▲부정접속차단 ▲보고서 ▲증명서위변조방지 ▲음성변환바코드 ▲파일전송 ▲전자서명 등 9개의 필수 프로그램과 ▲PDF뷰어 ▲화면캡처방지 ▲시점인증 ▲파일복호화 ▲전용메일수신 ▲통합웹메일 등 6개의 선택 프로그램이 기자(이용자)를 기다렸다.
서비스 이용을 위해 굳이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6개의 프로그램은 제외하고 9개의 프로그램은 ‘무조건’ 사용자의 PC에 다운로드를 해야만 했다. 전체설치를 클릭했다. 잠깐 딴 짓이라도 하려던 찰나 컴퓨터는 사용자에게 ‘열려 있는 프로그램과 웹 브라우저를 모두 닫고 국세청 사이트에 재접속하라’는 경고 문구를 여러차례에 걸쳐 보냈다.
서너번의 재접속 과정 후에야 다운로드 설치가 완료됐다.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하고 나니 오전 10시40분이 훌쩍 지났다.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위해 10여분의 시간을 쓴 것보다 재부팅과 로그인, 다운로드의 과정을 반복한 것이 이용자에게 ‘참을 인(忍)’을 새기게끔 했다.
특히 사용자의 PC 환경, 다운로드 설치여부 등 각자의 상황에 따라 공인인증서 로그인을 위해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천차만별 달랐다. 이 같은 불편함을 느낀 이용자들은 SNS를 통해 “다운로드 받고 재부팅을 하느라 한시간이 걸렸다”며 ‘시대를 거꾸로 가는 국세청’, ‘개편이라고 부르는 것이 민망하다’ 등의 반응을 보이며 비판했다.
이밖에도 기존 e세로나 현금영수증 홈페이지에 가입된 사업자 회원에게 재가입을 요구하거나 윈도(Windows) 외 다른 운영체제(OS)는 지원하지 않는 새로운 홈페이지에 대한 이용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2000억원 투입했는데…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세청은 새로운 홈택스 시스템 구축을 위해 지난 2011년부터 3년 간 총 2302억원을 투입했다. 차세대 국세행정시스템인 만큼 국세청 개청 이래 최대의 IT 프로젝트로 투입된 비용도 남달랐던 것.
하지만 보안프로그램의 설치가 과도한 데다 기존 가입자들을 불편케 하는 요소가 늘어나면서 이용자들의 접근성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보안업계의 한 전문가는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한번에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설치하다보니 프로그램 간 충돌이 일 수 있다”며 “이용자의 서비스에 따라 선별적인 설치가 가능한데 한꺼번에 9개 이상의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기술적인 문제 외에도 최근 정부의 ‘액티브 X(엑스)’ 폐지 정책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됐다.
논란이 일자 국세청은 필수와 선택 프로그램이 함께 나열됐던 기존의 페이지를 별도 분류하고 필수 프로그램의 설치를 권장하는 방식으로 공지를 교체했다.
앞으로 필수 설치해야 하는 보안 프로그램 수도 줄여나갈 계획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이전까지 8개 사이트에서 별도 운영하던 서비스를 통합하면서 설치해야 할 프로그램도 그만큼 늘어난 것”이라며 "개편 초기인 만큼 이용자들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만전을 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7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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