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된 하루를 보내고 터벅터벅 집에 돌아온 당신.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쉰 김치와 말라버린 멸치볶음, 김 몇장이 전부다. 한숨을 쉬며 전화기를 들어 또 음식배달을 시킨다.

매일 인스턴트식품과 배달음식을 먹는 것이 지겨운 사람을 위해 도시에서도 즐길 수 있는 가정식 백반집을 찾았다. 기자가 찾아간 백반집에는 공통점이 있다. 메뉴판이 없다는 것. 하긴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인데 메뉴판이 있을 리가. 양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 달라면 밥이든 반찬이든 원하는 만큼 더 준다. 물론 남기면 괜히 눈치가 보인다.


 

/사진=머니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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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량진 가정식 1호점 ‘언덕’

노량진 학원가를 뒤로 하고 먹자골목을 따라 계속 들어가면 주황색 간판의 ‘언덕’이 나온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니 식사를 기다리는 이들로 북적였다.

“아들은 몇명이 왔어?” 주문하려고 줄 서 있는 기자에게 사장이 던진 첫마디였다. 여기 오는 손님 대부분은 지방에서 올라와 고시준비를 하는 학생들이다. 따뜻한 집밥이 그리워 이곳을 찾는 이들은 사장에겐 아들이고 딸인 듯하다.

혼자라고 대답하자 사장은 저쪽 가서 먹으라며 자리를 권했다. 이날의 메뉴는 김치볶음밥. 고슬고슬하니 윤기가 좔좔 흐르는 하얀 밥에 매콤한 볶음김치를 곁들여 노란 계란프라이로 마무리 한 김치볶음밥은 혼자 해먹었던 김치볶음밥이 얼마나 볼품없었는지를 느끼게 했다.

반찬은 어묵이 푸짐하게 들어간 어묵국과 소시지, 무말랭이, 멸치볶음, 버섯무침, 옥수수샐러드였다. 하나하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졌지만 왠지 반찬이 적어보였다. ‘부족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스치던 찰나 사장은 마치 머릿속을 들여다본 듯 “부족하면 더 갖다 먹어”라며 웃음을 지었다.

흐르는 군침을 참으며 사장이 안내해 준 자리로 이동했다. 그런데 특이했다. 일반식당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4인석 테이블은 두개뿐이고 나머지 자리는 식탁이 벽에 붙어있는 바(bar) 형태였다. 혼자 식사하러 오는 학생이 많다보니 그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하지만 4인석 테이블에도 모르는 사람끼리 앉아 식사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밥을 슥슥 비비고 있자니 옆에서 혼자 밥을 먹는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대전에 거주하지만 9급 공무원시험 때문에 혼자 상경했다는 박승현씨(가명·30)는 이곳에서 한달치 식권을 미리 구매해서 밥을 먹는다.

박씨는 “노량진에 6개월 정도 살았는데 여기 밥이 다른 곳보다 담백해서 먹고 난 후에도 부대낌이 없다”며 “매일 와도 항상 사장님이 친근하게 맞아줘서 기분도 좋아진다”고 말했다. 먼저 식사를 마친 후 빈그릇을 들고 나가는 그에게 사장이 맛있게 먹었냐고 묻자 박씨는 “정말 맛있었어요, 이모. 그런데 내일은 고기반찬 해줘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거리낌없이 농담을 주고받는 모습에서 진짜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머니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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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같은 분위기, 홍대 ‘해달밥술’

요즘 핫플레이스로 주목받는 연남동. 젊음의 거리답게 온갖 특색있는 식당이 모여있다. 그 가운데 넉넉한 인심으로 손님을 사로잡은 가정식 백반집 ‘해달밥술’이 있다. 특이한 상호는 가게의 정체성을 설명해준다. 해가 뜨면 밥을 팔고 달이 뜨면 술을 판다는 뜻이라나.

입구에 들어서자 홍대 특유의 감성적인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모던한 베이지톤 벽지에 세련된 일러스트를 그려놔 마치 카페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향긋한 커피향 대신 풍기는 고소한 나물 냄새가 이곳이 식당임을 일깨워준다. 사장은 젊은 층이 많이 찾는 곳이어서 그들의 취향을 고려했다고 설명한다.

기자는 두명이 앉을 수 있는 작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앉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이 하나씩 차려지기 시작했다. 여섯개의 기본 찬과 한개의 메인메뉴, 국과 밥이 이 집의 상차림 구성이다. 이날은 제육볶음이 메인이었다. 넓은 그릇에 소담하게 담긴 고기를 보자 침이 꿀꺽 넘어갔다. 도자기 같은 접시에 정갈하게 담긴 가지각색의 반찬은 여느 한정식 집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입맛을 확 당기는 구수한 된장국 안에 들어간 두부도 그냥 흰 두부가 아니었다. 사장에게 물어보니 손님들의 건강을 생각해 흑임자 두부를 사용한단다. 단돈 6000원에 건강까지 챙길 수 있다니 웬 떡인가 싶어 야들야들하고 담백한 두부를 실컷 음미했다.

먹다 돌아보니 사장은 오늘의 점심 메뉴를 알리는 게시판을 지우고 있었다. 벌써 점심시간이 끝났나 싶었지만 시계는 12시50분을 막 지난 시점. 준비해놓은 음식이 모두 떨어졌단다. 매일매일 새로운 재료로 반찬을 만드는 만큼 그날 판매할 분량만 적당히 준비하는 것이 이곳의 ‘영업방침’이다. 점심시간이 끝난 후에도 두세팀이 식사하려고 찾았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다.

식사를 마칠 무렵 손님 한명이 가게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점심값 계산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기자는 바쁘면 실수할 수도 있겠거니 대수롭잖게 넘겼지만 손님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손님은 “언니, 식사 값 계산 잘못했어요. 3만6000원인데 3만원만 받으셨네”라며 6000원을 더 내러 온 것이다.

멋쩍은 웃음을 짓는 사장을 뒤로한 채 돌아가는 그 손님에게 얼마나 자주 이곳에 오는지 물었다. 근처 회사에서 일하는 관계로 종종 이곳을 찾는다는 그는 “집에서 이런 밥을 직접 해먹기 정말 힘들다”며 “바빠서 배달음식을 시키거나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울 때가 많지만 시간이 나면 꼭 여길 찾는다”고 말했다. 그는 “새해가 되면 사장님께서 손님에게 감사의 의미로 떡국을 무료로 대접하기도 하는데 고향에 못 내려가는 회사 동료들이 무척 좋아했다”고 귀띔했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8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