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는 더위가 여전하지만 하늘이 높고 맑아 완연한 초가을 날씨를 느낄 수 있었던 지난달 15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25번 국도 옆 고즈넉한 풍경 속에 둘러싸인 김영조 낙화(烙畵)장(65세)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전통 낙화의 맥을 이어가는 국내 유일의 낙화장인(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이다. 낙화는 불에 달궈진 인두로 종이나 섬유, 나무, 가죽 등의 표면을 지져서 그림이나 문양 등을 표현하는 한국의 전통예술이며 이런 기능을 가진 사람을 낙화장이라 부른다.



/사진=성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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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공예 맥 잇는 장인의 과거를 엿보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그는 "백번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고 느끼는 게 더 의미 있다"며 청목화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이곳은 그가 낙화와 함께 한 40여년의 세월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00여점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8m 길이의 12폭 병풍 '낙화강산무진도'(烙畵江山無盡圖)가 눈에 들어온다. 한국화에 조예가 깊지 않은 기자가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작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규모에 놀랐고 한발 다가서 살펴본 후에는 그 세밀함에 감탄했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를 전통 낙화기법으로 재현한 것이다. 김 낙화장은 "조선시대 최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추켜 세웠다.

그의 말을 들은 후 "이런 대작을 어떻게 붓이 아닌 인두로 표현했을까'라는 생각이 기자의 머리를 스쳤다. 동시에 원색의 강렬한 색채를 주로 사용하는 서양화와는 다른 낙화의 편안하고 잔잔한 색감이 낯설지만 뭔지 모를 끌림으로 다가왔다.


작품을 둘러보고 화랑 옆 한편에 있는 작업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2015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9월16일~10월25일)에 출품할 석굴암 대불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는 "낙화를 그리기 위해선 가장 먼저 인두를 빨갛게 달궈야 한다"며 화롯불에 연신 손풀무를 돌렸다.


/사진=성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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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풀무질을 하는 동안 낙화 도구를 살펴보니 생각보다 단출했다. 면이 평평한 평인두와 끝이 'ㄱ'자로 굽은 앵무부리인두, 세밀한 표현을 위해 인두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받침쇠, 인두에 묻은 이물질을 닦는 인두닦개, 황토로 만든 인두받침대가 전부다.

김 낙화장은 자신의 뺨 쪽에 인두를 갖다 대 인두가 적정한 온도인지 가늠했다. 이윽고 그의 손이 나무판 위를 오갔다. 그의 손길을 따라 음영과 농도의 차이가 나타나면서 작품이 제모습을 갖춰갔다.

그는 "불의 온도, 힘 조절, 종이재질 등 미묘한 차이가 작품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며 더욱 작업의 속도를 올렸다.


낙화장 전수관. /사진=성동규 기자
낙화장 전수관. /사진=성동규 기자

◆인두로 그려낸 전통…세계 달군다

인두로 그림을 그릴 때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나무가 타들어 가면서 나는 구수한 향기에 취해 기자가 한동안 넋을 놓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이 처음 낙화를 시작한 이유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서였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원래 그의 꿈은 화가가 되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해 곧잘 동양화를 따라 그리며 혼자 실력을 키운 덕분에 각종 미술대회에도 입상했으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든 꿈을 접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우연히 그림도 배우고 취업도 보장된다는 신문의 '낙화연구생 모집' 공고를 보고 바로 당시 종로에 있던 한국낙화연구소를 찾아갔다. 그는 "집이 성남이라 연구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정말 열심히 배웠다"며 "잠잘 시간도 쪼개가며 오롯이 낙화에 매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날 무렵 연구소는 운영이 점차 어려워져 결국 문을 닫았다. 그리고 남은 동료 5명과 함께 종로2가에 사무실을 얻어 낙화 연습을 이어가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자 외국인관광객에게 낙화를 판매하는 사무실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년여가 지나자 동료들은 각자의 길로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기념품을 제작해 전국 유명관광지를 다니며 판매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