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는 병 ‘알츠하이머’를 자신도 앓을 거라고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남의 일로 치부하거나 영화·드라마 속의 상황으로 여기기 십상이다. 케이블채널 tvN 금토드라마 <기억>은 40대 중반의 로펌변호사 박태석(이성민 분)이 알츠하이머를 선고받은 후 남은 인생을 걸고 벌이는 법정 미스터리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고 처음엔 혼란을 느끼던 박태석은 자신의 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정의로운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당당하게 해낸다. 이 드라마는 학원폭력 등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지만 외면받던 사건을 다뤄 시청자의 공감을 불러왔다. 공원에서 박태석의 아들이 “아빠, 난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아빠 오늘 멋있었다”고 말했을 때 아들을 바라보면서 ‘아빠는 언젠가 오늘을 잊게 될 거야. 아들이 처음으로 나에게 ‘멋있다’고 말해준 것도 잊게 될 거야’라고 혼자 속으로 되뇌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박태석의 기억이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왜곡되면서 사건에 대한 판단력이 흐려지고 머릿속 시간이 흐트러지는 과정에서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현실이 된 조발성 알츠하이머

사회적으로 한창 활동하는 시기에 알츠하이머가 닥쳐오는 것은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아직 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시기에 발생하는 조발성 알츠하이머, 즉 초로기 치매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알츠하이머 치매를 진단받은 40~50대가 2008년 2618명에서 2012년 4185명으로 4년 새 60%나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치매환자 수도 2008년 42만명에서 2012년 52만명으로 24%나 증가했는데 그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젊은 층에서의 치매환자 수가 증가한 것이다. 특히 절대 숫자보다 발병률의 증가 폭에 주목해야 한다.


치매는 노인성 질환으로 인식되는 만큼 65세를 기준으로 그 이전에 나타나면 ‘조발성(초로기·early-onset) 알츠하이머’, 그 이후에 발병하면 ‘만발성(노년기) 알츠하이머’로 구분한다. 용어를 혼동하기 쉬운데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병이 시작하는 단계인 ‘초기(early-stage) 알츠하이머’와 구분해야 한다.

조발성 알츠하이머는 병의 진행속도가 빠르고 초기증상으로 언어기능의 저하가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만발성 알츠하이머는 상대적으로 병의 진행속도가 느리고 기억력 손상이 심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전체 알츠하이머 중 약 10%가 조발성으로 알려졌으며 대한치매학회는 초로기 치매환자가 전체 치매환자의 20%에 달할 것으로 추정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공공의료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014년 초로기 치매환자는 8881명에 달했다. 병원에서 치매 진료를 받지 않아 통계에 잡히지 않는 환자도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발성, 가장 큰 원인은 ‘유전’


퇴행성 뇌질환인 초로기 치매는 1907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알로이스 알츠하이머에 의해 최초로 보고됐다. 의사 알츠하이머는 기억력 및 지남력 장애에 시달리던 51세 부인이 5년 후 사망하자 부검을 시행하고 결과에 대한 소견을 학회에 발표했다. 알츠하이머병은 뇌 안에 아밀로이드 베타 단백질이라는 독성물질이 축적되면서 뇌신경세포가 점진적으로 소멸돼 나타난다.

조발성 알츠하이머의 절반 정도는 APP, PS1, PS2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발생한다. 세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릴 위험을 증가시키는 ApoE(Apolipoprotein) 유전자와 다른 것들이다. 조발성 알츠하이머의 원인은 가족력인 경우가 많다. 부모나 조부모가 젊은 나이에 알츠하이머에 걸렸다면 자녀도 발병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스틸 앨리스>는 50세에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린 대학교수가 주인공이다. 콜럼비아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앨리스(줄리안 무어 분)는 하버드대학 교수인 남편, 법대에 다니는 큰딸, 의대에 다니는 큰 아들, 배우를 꿈꾸는 막내딸까지 다복한 가족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터인가 평소 사용하던 단어가 떠오르지 않고, 늘 만들던 요리의 레시피가 헷갈리고, 자주 달리던 조깅코스를 낯설게 느끼면서 당혹해한다. 신경외과에서 조발성 알츠하이머로 진단받는데 자식들에게도 유전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린 앨리스는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전하며 “미안해”를 반복한다. 임신을 계획하던 큰 딸이 유전자를 물려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앨리스는 괴로워한다. 줄리안 무어는 머릿속에서 뭔가가 지워지고 자신의 일부를 조금씩 상실해가는 상태를 실감나게 표현해 지난해 87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또 골든글로브, 워싱턴DC비평가협회, 시카고비평가협회, 전미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 등을 휩쓸었다.

알츠하이머를 잘 고증해 만든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 많은 병원과 의사, 연구소와 연구자의 도움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리사 제노바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를 지켜보면서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신경학 박사인 그는 할머니를 떠올리면서 앨리스가 기억을 잃어가는 심리를 섬세하고 생생하게 묘사해 처음 쓴 장편소설임에도 브론테상을 수상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야.” 엘리스와 딸의 대화다.

알츠하이머 환자가 등장하는 작품들이 대부분 주변 사람이 겪는 고통에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달리 이 작품은 환자의 관점에서 의식세계를 따라가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 많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줬다. 이 소설은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아마존 종합베스트셀러를 모두 기록했다.

알츠하이머 초기에 기억력부터 감소하는 이유는 뇌에서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 주변 부위가 가장 먼저 손상되기 때문이다. 이후 뇌 손상이 점차 다양한 영역으로 진행돼 언어능력, 시·공간능력, 주의력, 집중력 등 뇌의 여러 기능이 쇠퇴한다.


tvN 금토 드라마<기억>제작발표회. /사진=뉴시스 김동민 기자
tvN 금토 드라마<기억>제작발표회. /사진=뉴시스 김동민 기자

◆삶의 소중한 가치 ‘기억’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뇌의 원래 기능들이 사라지다가 8~10년쯤 되면 결국 사망하는데 길게는 20년까지 살기도 한다. 생존기간이 길더라도 기억을 입력하는 신경세포가 죽어가면서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노인이 치매에 걸려 점점 변해갈 때 가족 등 주변 사람이 이를 이해하기 쉽지 않을 텐데 그 경우가 젊은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이 경우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영화 속 앨리스는 병이 심해져 사람들 앞에 서기 어려운 상태에서도 알츠하이머학회에 나가 “이상하고 무능력해 보이는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모습은 그들의 진짜 모습이 아니며 병이 원인일 뿐”이라고 연설한다. 팔, 다리, 눈, 귀, 신장을 비롯한 각종 장기에 문제가 생기는 것처럼 뇌 역시 신체의 일부로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을 무조건 싫어할 것이 아니라 연민의 정으로 바라본다면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앨리스의 남편은 일 때문에 다른 곳으로 떠나지만 막내딸 리디아는 LA에서 뉴욕으로 돌아와 엄마와 함께 살며 영화는 결말로 향한다. 미국인데도 중병인 가족을 시설이나 병원에 맡기지 않고 가족이 떠맡는 것은 앨리스가 리디아에게 마지막으로 말하는 대사인 ‘Love’(사랑)와 연관된다. 읽을 수도 없고 말을 제대로 할 수도 없게 된 앨리스가 한마디 내뱉은 말 ‘사랑’은 가족을 향한 마음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향한 표현일 것이다.

드라마 <기억>에서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남은 인생 전부를 마지막 변론에 바치려 노력하는 박태석의 모습과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 사는 곳의 주소, 첫째딸 이름 등을 묻는 질문을 휴대폰에 메모하고 답하면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앨리스의 모습을 통해 살아있는 기억 자체가 삶의 소중한 가치임을 느끼게 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432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