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상바이러스가 전국을 뒤덮은 가운데 서울역을 출발한 부산행 KTX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한국영화의 1000만 관객 돌파는 2003년 <실미도>를 시작으로 올해 <부산행>이 14번째다.


<부산행>은 앞선 1000만 영화와는 색깔이 다른 캐릭터 ‘좀비’를 내세운 점이 특징이다. 개봉 전 국내 최초의 좀비 재난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성공하기 힘들다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왔다. 더욱이 이 영화는 이름마저 생소한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다. 연 감독은 애니메이션만 만들었고 실사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만화영화 몇편 만들어본 감독이 실사영화를, 그것도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진 것. 이 같은 우려에도 <부산행>이 흥행에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뉴시스 김선웅 기자
/사진=뉴시스 김선웅 기자

◆관객에게 질문 던진 시나리오

기본적으로 멀티플렉스를 갖춘 배급사는 많은 스크린을 확보할 수 있어 관객동원 차원에서 유리하다. 배급사와 연계된 멀티플렉스의 경우 스크린 기준 극장점유율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지난해 한국영화의 배급사별 관객점유율을 보면 씨제이이앤엠 40.5%, 쇼박스 31.3%로 두 회사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부산행>의 투자배급사는 멀티플렉스가 없는 ‘넥스트엔터테인먼트월드’(NEW)다. 이 회사의 관객점유율은 15%다.

NEW는 대기업인 CJ, 롯데, 쇼박스가 배급시장을 장악하던 2008년 자본금 20억원의 중소영화사로 설립됐다. 그럼에도 2013년 <7번방의 선물>과 <변호인>을 투자·배급해 1000만 신화를 만들더니 올해 <부산행>까지 설립 8년만에 3편의 1000만 영화를 배출하는 기록을 세웠다.


<7번방의 선물>은 역대 1000만 영화 중 제작비 대비 최고수익을 기록했다. 또 <변호인>은 웹툰 스토리작가였던 양우석 감독이 처음 연출한 작품이다. <7번방의 선물>은 39년만에 무죄선고를 받은 실존인물을 다뤘고 <변호인>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권변호사 시절을 담았다.

반면 <부산행>은 B급 호러 코미디 영역으로 간주되는 좀비가 나오는 영화다. 기존 대형영화사가 꺼리는 신인감독과 시나리오를 선택해 콘텐츠에 집중한 것이 성공비결로 꼽힌다. NEW는 올해 드라마에서도 <태양의 후예>로 대박을 냈다.


NEW가 몇억원짜리 애니메이션만 만들던 연상호 감독에게 100억원 수준의 제작비를 투자해 <부산행>을 만들게 한 것은 그의 두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사이비>를 투자 배급하면서 쌓아온 신뢰가 바탕이 됐다.

<사이비>는 2013년 세계 3대 판타스틱영화제로 꼽히는 시체스국제영화제(46회)에서 애니메이션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어 히혼국제영화제(51회)에서는 미국 빌 플림튼 감독의 <치팅>과 공동으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토론토국제영화제(39회) 뱅가드부문과 AFI영화제에 유일한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초청됐다. <사이비>를 관람한 저명한 영화평론가 달시 파켓이 세계 영화계가 연 감독을 주목할 것이라고 확신했을 정도다.

<사이비>는 수몰예정지역인 마을에서 기적을 빙자해 사람들을 현혹하는 목사, 그의 정체를 아는 술주정뱅이 폭군, 그리고 주변인들이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룬 영화다. 사회고발 작품으로 ‘당신이 믿는 것이 진짜인지’ 묻는다.

연상호 감독은 사람이 쉽게 믿는 것은 진짜가 아니며 진짜가 아닌 것을 믿기 시작하면 세상이 끔찍해진다는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는 사람이 힘들 때 무언가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으며 힐링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한다. 믿음이란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가치와 신념을 포함한다.

<사이비>는 단순한 선악구도가 아닌 ‘진실을 아는 자가 마을주민이 가장 불신하는 사람’이라고 설정해 스토리에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관객은 주인공이 착해지길 원하는 관성이 있다. 그러나 <사이비>는 주인공이 우는 순간 관객이 ‘저 사람이 개과천선해 착해지나 보다’라고 생각할 때 이를 뒤집으면서 충격을 준다. 믿고 싶어하는 관성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시나리오를 쓸 때 <사이비>는 극영화를 염두에 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사나 상황이 일반영화처럼 사실적이다. 애니메이션이지만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관객 스스로 사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범상치 않은 시나리오임을 알 수 있다. 실사영화에서도 시나리오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므로 그의 시나리오 쓰는 능력이 실사영화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원동력일 것이다.

<사이비>의 순 제작비는 3억8000만원에 불과했다. 연 감독의 첫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은 그보다 더 저렴한 1억5000만원으로 제작했다. 관객도 1만9000명에 불과했지만 20개관을 넘는 상영관에서 상영됐음을 감안하면 나름 괜찮은 성적이다. 학교 안에서 형성되는 계급사회를 강렬하게 표현해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요즘 사회적으로 갑을 관계가 종종 거론되듯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사회의 모습을 강자인 개와 약자인 돼지로 묘사했다. 사회에서 하부계층이 기대고 싶어하는 것, 우상이 필요한 대중을 우화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과거에는 주먹을 쓰는 학교 폭력의 주체자가 일반적으로 공부 못하는 애들이었지만 <돼지의 왕>에서는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은 아이가 학교를 휘어잡는다. 학교 내 계급구조가 그대로 사회시스템으로 이어지는 현상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끝 부분에 독창적인 반전을 넣어 짜릿한 재미까지 안겨준 <돼지의 왕>은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3관왕을 휩쓸었다. 2012년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사상 처음으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또 에든버러 국제영화제, LA·뉴욕 아시아필름 페스티벌, 시드니영화제, 파리 시네마영화제, 몬트리올 판타지아 장르영화제 등에도 초청받는 등 전세계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해외관계자들은 “단순한 학교 얘기가 아니라 전세계의 체계에 대한 우화”라며 공감을 표했다.

◆사회적 이슈, 대중에게 전달

연상호 감독은 어려서부터 애니메이션을 매우 좋아해 고등학생 때 세탁기 박스를 가득 채울 만큼 비디오를 모았다고 한다. 일본, 유럽, 미국 월트디즈니의 작품 등을 녹화해 모았는데 취향이 분명해지면서 애니메이션 감독의 꿈을 키웠다.

중학교 시절 부모 계급에 따라 아이의 계급도 결정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경험이 시나리오 쓸 때 반영됐다. 그는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지 못해 순수미술을 다루는 서양화과에 입학했고 혼자서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연 감독은 대학교 1학년이던 1997년 첫 작품을 만들었다. 작업할 공간이 없어 학교의 빈 작업실에서 도둑처럼 몰래 작업하고 모르는 사람 집의 주차장에서 작업해 7분짜리 작품을 7개월 걸쳐 만든 것.

대학졸업 후 줄곧 독립영화와 독립애니메이션을 만든 연 감독은 초창기엔 돈이 없어 배경, 원화, 동화, 편집은 물론 각본과 연출까지 혼자 힘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들게 만든 독립중편애니메이션 <지옥>(2003년)이 아시아 최대 단편영화제인 쇼트쇼츠 국제단편영화제에서 아시아고스트어워드를 수상했다.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얻어낸 성과였기에 더욱 값졌다.

<지옥> 판권이 프랑스에 팔리면서 3000만원가량의 돈이 들어왔다. 이후 독립제작시스템에 대한 의지를 더욱 굳히고 단편 애니메이션을 꾸준히 제작하면서 세계에서 인정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의 기틀을 다졌다.

실사영화 감독을 꿈꾸지 않았던 연 감독은 <돼지의 왕> 연출 당시 실사영화 감독을 제의받았다. 제작자가 유명한 배우를 기용해 몇백개 관에 걸리는 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그림에 대한 욕구가 컸던 연 감독은 애니메이션을 고집했다. 실사 연기자가 표현하는 것과 애니메이션에서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쓴 시나리오 세계를 그림들로 적절하게 표현해 영상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글에 기반을 둔 스토리텔링을 넘어 액션으로 뉘앙스를 만드는 실사영화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러던 중 신규 애니메이션 <서울역>을 작업할 때 NEW에서 이 작품을 실사영화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똑같은 이야기를 두번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는 <서울역> 이후 이야기를 실사영화로 만드는 것을 역제안했고 그 결과 <부산행>이 탄생했다.

상업영화인 <부산행>에도 그는 주제의식을 분명히 드러냈다. 정상인과 좀비 사이에서 공포에 떠는 인간군상을 잡아내면서 악인과 선인으로 분류되는 지점을 흥미롭게 그렸다. 가족의 사랑을 말하는 주제도 포함해 관객을 청소년층에서 노년층까지 넓혔다. 좀비영화를 본적이 없는 사람을 위해 아버지와 딸의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만큼 성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고 관객이 직관적으로 파악하도록 전형화된 인물로 기획했다.

배우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좀비를 물리치는 액션을 설계해 오락적 재미도 더했다. 흥행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시나리오를 짜 대박을 낸 것이다. <서울역>에서는 노숙자를 바라보는 서울시민의 시각도 녹여냈다. <부산행>보다 메시지가 무겁고 사회비판적인 시선을 담아 성인을 위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는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떻게 하면 사회적인 이슈를 대중에게 잘 전달할지 고민한다. 철학적 메시지를 느끼면서 애니메이션을 보려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연상호 감독의 작품은 그 관습을 깨버린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50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