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뜨겁다. 촛불을 들고 모인 국민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다. 많은 이들은 ‘촛불혁명’으로 불릴 올 겨울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며 ‘광장’이란 공간에 집중한다. <머니S>는 2016년을 마무리하며 ‘광장’을 돌아봤다. 촛불정국뿐 아니라 일상에서 광장이 삶에 어떻게 기능했는지 살펴봤다. 세계사의 중심이 됐던 각국의 ‘광장’도 되짚어봤다. 이를 통해 광장이 가지는 경제·정치·사회적 의미를 재조명했다.

우리는 ‘광장’에서 피를 쏟으며 민주화를 쟁취했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 축구의 승리를 외쳤다. 최근에는 서울 광화문광장에 모인 촛불민심이 박근혜 대통령 탄핵안의 국회 가결을 이끌어내며 광장의 역할이 재조명됐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세계 여러 나라 국민이 저마다 이루고자 하는 열망을 고스란히 드러낸 역사의 현장 역시 광장이었다.

◆이탈리아 - 르네상스의 심장 ‘시뇨리아광장’


‘시의회’라는 뜻을 지닌 이탈리아 피렌체의 시뇨리아광장은 르네상스의 심장이자 시민의 목소리가 들끓던 역사의 현장이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상과 같은 르네상스시대 다양한 조각을 감상할 수 있는 야외예술전시장인 동시에 공화정시대 광장에 모여 토론하고 거수투표를 하면서 공공모임에 참여했던 시민의 얼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곳은 종교개혁가 사보나롤라가 최후를 맞은 곳이다. 그는 15세기 피렌체에서 종교개혁을 주창했던 열정적인 수도사로 성당의 독재와 사치에 격렬히 반대했으며 귀족과 타락한 성직자를 비난했다.

그러다 그의 독설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었던 피렌체정부에 의해 시뇨리아광장에서 화형당했다.


스페인 - 독재에 맞선 ‘카탈루냐광장’

카탈루냐광장은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비싸고 번화한 곳이다. 바르셀로나의 거의 모든 버스와 지하철 노선이 이곳을 경유할 만큼 발전을 거듭하며 바르셀로나 산업화의 중심에 섰지만 동시에 역사적 아픔이 깃든 장소기도 하다.


스페인 군부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36~1939년 일어난 스페인내전 시기 공화군 진영에서 그와 맞서 싸운 카탈루냐 시민을 무참히 짓밟았다.

시민들은 카탈루냐광장으로 나와 스페인 국기를 끌어내리고 카탈루냐 국기를 게양하며 군부독재 타도를 외쳤다.

결과적으로 군부가 내전을 제압하며 카탈루냐 독립운동가와 무정부주의자를 무참히 처형했고 이 같은 잔인함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1975년 무렵까지 이어졌다.

그가 사망한 뒤 스페인에도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카탈루냐의 독립 요구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체코 바츨라프광장. /사진=머니S DB
체코 바츨라프광장. /사진=머니S DB

◆체코 - 프라하의 봄 외친 ‘바츨라프광장’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광장은 말을 파는 시장이었다. 이전 500년 동안 말 상인과 마차꾼이 드나들던 이곳에 자유의 갈망이 묻어난 건 1939년 탱크를 앞세운 히틀러의 나치군대가 바츨라프광장을 점령하면서부터다.

6년간 계속된 이들의 점령은 2차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5월5일 바츨라프광장에서 나치에 항거하는 시민들의 봉기가 커지면서 균열이 일었다.

시민들은 합심해 나치군대를 몰아냈지만 얼마 못가 소련의 간섭으로 다시 자유를 잃었다. ‘프라하의 봄’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시민들의 투쟁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고 소련은 대포를 쏘며 맞섰다.

1969년 스물한살 청년 얀팔라흐는 바츨라프광장에서 자유를 외치며 분신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바츨라프광장은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외치던 프라하시민들의 눈물이 담긴 역사적 광장이다.

중국 텐안먼광장. 사진=뉴시스 DB
중국 텐안먼광장. 사진=뉴시스 DB

◆중국 - 민주화 투쟁의 혼 ‘텐안먼광장’

텐안먼광장은 자금성으로 들어가는 문인 텐안먼 앞에 있다. 청나라시대 텐안먼은 법령을 읽거나 사형선고를 내리는 연단으로 쓰였다.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1949년 10월1일부터는 당 지도자들이 매년 모여 대중집회와 군악 행진을 벌이는 장소로 바뀌었다.

하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른 공산당에 맞서 20만명에 이르는 베이징 시민이 정치개혁을 요구하며 텐안먼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89년 6월4일 중국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시민에 총구를 겨눈 텐안먼사태가 발발했다.

중국정부에 대항해 민주화와 인권 신장을 부르짖던 수천명의 시민들은 주검이 돼 텐안먼광장으로 돌아왔고 중국의 민주화 물결은 다시 한번 고초를 겪으며 후퇴했다.

◆아르헨티나 - 혁명의 흔적 ‘오월광장’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월광장에도 군부 권력에 맞서 혁명을 외친 시민의 투쟁이 묻어난다. 특히 우리에게 영화 <에비타>로 친숙한 에바 페론은 오월광장 혁명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로 꼽힌다.

1945년 노동부 장관이었던 후안 도밍고 페론은 당시 빈민가의 편에 서 군부의 이단아로 찍혔다. 보수적인 군부 시각에서 그의 선행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곧 체포돼 구금됐다.

연인이었던 에바 페론은 오월광장에서 그의 석방을 위해 울부짖었고 20만명이 넘는 시민이 광장에 나와 그의 석방을 외쳤다.

이에 8일 만에 석방된 후안 도밍고 페론은 에바 페론과 결혼해 이듬해 대통령이 됐지만 그녀는 1952년 33세에 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아르헨티나 시민들은 아직도 오월광장에서 그녀를 영적 지도자로 추모하고 애도한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6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