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아스라이 윤곽만 보이는 진리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긴 항해다. 즐겁게 항해하다 꿈꾸던 장소에 발을 디딘 과학자는 도착하자마자 불행해진다. 지금 막 도착한 장소는 금세 따분해지고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자태로 과학자를 유혹한다. 과학은 도달한 장소의 이름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질 긴 여정에 붙은 이름이다.


과학이라는 긴 여정에서 과학자 혼자서는 결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과학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착된 문화가 있다. 바로 다른 과학자에 대한 신뢰다. 실제 존재하는 실험자료로 조작 없이 연구를 수행했다는 신뢰다. ‘일단 믿고 보자’라는 관행이 과학계에 어떻게 자리 잡았는지는 신뢰가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방금 읽은 논문내용을 믿지 못한다면 새로운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직접 다시 확인해야 한다. 시간과 돈이 드니 과학의 발전은 더딜 수밖에 없다. 과학자도 사람이라 실수를 한다. 성실한 연구 중에 만들어진 실수는 다른 과학자가 바로 잡지만 실수한 과학자에게 큰 책임을 묻지 않는다. 하지만 조작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연구조작은 과학계의 상호 신뢰라는 관행을 악의적으로 이용한 최악의 부정행위다. 연구결과를 조작한 사람을 과학자 사회의 일원으로 생각할 과학자는 없다.


과학은 목표가 미리 정해지지 않은 과정이다. 어디에 도달할지 미리 아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만년 전에 동시에 창조됐다고 100퍼센트 확신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과학자일 수 없다. 본인이 자신의 확신을 과학이라고 부르든 말든 말이다. 생명의 역사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연구과정에서 밝혀질 내용이지 연구 이전에 미리 상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지구 전역에서 공룡의 화석과 인류의 화석이 같은 지층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된다면 당장이라도 과학계는 지금까지 합의된 결론을 바꿀 것이다. 실제 수많은 화석기록은 그렇지 않으니 인류의 탄생이 공룡의 멸종 이후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이다.


물론 잠정적인 결론이다. 과학은 100퍼센트 확실한 결과를 주지 않는다. 단지 지금까지의 증거를 모아 최선의 결론을 내리고 끊임없이 그 결론을 개선하는 과정이다. 과학의 적은 목표에 대한 확신이다. 과학은 저 앞에 보이는 명확한 공격목표를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과학 앞에 ‘~을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없는 과학을 꿈꾼다. 창조경제든 4차 산업혁명이든 마찬가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4호(2017년 9월6~1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