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갈등은 제조업 기반인 한국산업의 가장 큰 위협으로 꼽힌다. 갈등의 핵심 뇌관은 ‘통상임금’ 문제다. 산업 성장속도에 비해 노동자의 권리가 느리게 제도화되면서 뒤늦게 반작용이 터져나오는 것. 자칫 뇌관이 잘못 터지면 한국 제조업은 절체절명의 위기로 치닫는다. 지금도 수많은 기업이 통상임금을 놓고 소송을 진행 중이다. 최근 1심 판결이 난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반환소송은 통상임금 갈등의 상징과도 같다. 기아차 판결을 통해 우리 제조업이 직면한 통상임금 문제를 들여다봤다.<편집자주>

6년을 끌어온 기아자동차의 통상임금소송 1심 법원이 원고인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권혁중 부장판사)는 기아차 생산직근로자 2만7459명이 2011년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소송의 1심 선고에서 “원고에게 원금 3126억원과 이자 1097억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원고가 청구한 금액(1조926억원)의 38% 수준을 인정한 것.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판단했고 경영계가 주장한 ‘신의성실원칙(신의칙) 위배’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원고의 완벽한 승소로 해석된다.


[통상임금에 흔들리는 제조업] 기아차, 결국 터졌다


◆ 정기상여금 통상임금 인정

이번 판결은 우선 기아차의 정기상여금이 통상임금의 조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재판부는 “기아차가 근로자에 제공하는 중식비와 상여금 등은 고정적인 정기상여금으로 통상임금이 맞다”고 판결했다.


통상임금소송에서 일부 승소한 기아차 노조. /사진=뉴시스 최동준 기자
통상임금소송에서 일부 승소한 기아차 노조. /사진=뉴시스 최동준 기자



통상임금이란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이나 연차휴가 미사용 수당 등 각종 수당을 산정할 때 쓰는 임금 개념이다. 초과근무수당 등을 산정할 때 기본이 되므로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반영하는지 여부에 따라 수당의 차이가 크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회사가 통상임금에서 정기상여금을 빼고 계산해 수당 등을 지급한 것이 잘못됐으니 차액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낸 것이다.


기아차는 두달에 한번 정기상여금(기본급의 750%)을 지급하는데 지금까지 통상임금을 산정할 때 이 금액을 반영하지 않았다.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기로 한 노사 합의를 근거로 이같이 지급해왔다는 게 사측의 주장이지만 법원은 이 합의가 근로기준법 위반에 해당하므로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아차는 노측의 주장이 신의칙에 위배된다는 논리로 맞섰다. 신의칙이란 민법 2조에 명시된 대전제로 ‘법률행위를 할 때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행동해야 하며 상대방의 신뢰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기아차 노동자의 요구가 신의칙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사측이 주장한 경영상의 어려움에 대해선 기아차가 2008년부터 2015년 사이에 상당한 당기순이익을 거뒀고 당기순손실이 없다는 점을 토대로 이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고 봤다.

노조는 이번 판결에 대체로 만족하는 분위기다. 지급이 인정된 금액은 청구금액의 38% 수준에 그쳤지만 신의칙이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에 의미를 뒀다. 노조 관계자는 “법을 지키면 경영이 어렵다는 경영계의 신의칙 주장은 청산돼야 할 적폐”라며 “재판부의 이번 판단은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고 판단한다”고 밝혔다.


사측은 법원의 결정을 납득하기 어렵다며 항소를 결정했다. 기아차 관계자는 “청구금액 대비 부담액이 일부 감액되긴 했지만 현 경영상황은 판결금액 자체도 감내하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신의칙이 인정되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이며 회사 경영상황에 대한 판단도 이해하기 어렵다”고 항소 입장을 밝혔다.

◆ 기업 '통상임금 리스크' 초긴장

기아차는 이번 판결에 따라 실제로 지급해야 할 금액이 1조원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이번 판결이 원고뿐 아니라 기아차 전체 인원에 확대적용되며 소송 제기 이후의 기간에 대한 소급분도 지급해야 해서다.


이번 판결로 기아차는 올 3분기 적자전환이 불가피해졌다. 원고의 청구금액을 즉시 지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금액을 즉시충당금으로 적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사드보복으로 글로벌 판매량이 급감해 사실상 차입경영을 하고 있는 기아차가 적자까지 기록할 경우 유동성 확보와 자금조달이 어려워져 위기를 겪게 될 것”이라며 “이는 연관 부품사들의 위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또 기아차의 경영위기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현대제철 등 현대차그룹 주력 계열사의 고통분담을 수반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번 소송결과는 비단 자동차 관련업계뿐 아니라 전 산업계에 막대한 위협을 끼칠 것으로 예상된다. 기아차의 패소는 현재 진행 중인 다수 기업의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서 판례로 인용될 가능성이 높아서다.

소송 패소로 인한 일시적인 부담도 문제지만 더 큰 우려는 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으로 인해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비약적으로 늘어난다는 데 있다. 이에 주요 경제단체는 인건비가 상승할 경우 기업은 투자와 채용을 줄일 수밖에 없고 이는 우리나라 산업의 침체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이번 판결로 기업들이 예측하지 못한 추가 비용까지 부담하게 돼 산업경쟁력 약화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스럽다"며 "과도한 인건비 추가부담 등 기업경영의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해 통상임금 정의 규정을 입법화하고, 신의칙 세부지침을 조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경영계의 이런 주장에 대해 노동계는 통상임금의 정상화가 단순한 임금상승이 아니라 노동시장의 불합리성을 없앤 것이라고 반박한다. 오히려 신규채용을 늘릴 계기가 될 것이란 게 이들의 주장이다. 노동계 관계자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한다고 해서 채용이 줄어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현재 노동자에게 부과하는 과도한 시간외 근로를 신규채용으로 바꿔나가는 것이 기업이 해야 할 일”이라고 반박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04호(2017년 9월6~1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