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명동의 어제와 오늘
한양도성 해설기 21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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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명동은 조선시대 때 명례동(明禮洞) 또는 명례방(明禮坊)이라 불렀고 일제강점기에는 명치정(明治町)이라고 했던 거리다. 좁게는 명동 1·2가에서 넓게는 충무로 1·2가와 을지로 1·2가까지 포함하는 지역을 뜻한다.
일본인들이 1885년부터 진고개와 명동일대에 거주하기 시작했고 ‘본정통’으로 불린 충무로와 함께 화려한 상권이 형성됐다. 이곳에는 일본식당과 일본과자점이 생겨 구경거리가 많았다. ‘왜(倭)각시’ 구경한답시고 눈깔사탕을 사러 가는 한국인들 덕분에 일본인 가게주인이 부자가 돼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얘기도 있다.
조금 더 세월이 흘러 이곳은 요정이 즐비한 유흥가로 변했다. 밤이고 낮이고 흥청거리는 거리였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명동과 충무로의 요정에서 요리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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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
◆추억과 전설이 된 명동의 뒷얘기
문인, 미술인, 음악인도 명동의 다방에 모여들었다. 숨 가쁘게 밀려드는 서구문명의 겉모습에 빠져든 것이다. 당시 유럽과 미국의 유행은 도쿄의 번화가 긴자를 거쳐 명동과 충무로에 상륙했다.
명동은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들의 온상이기도 했다. 증권거래소에 해당하는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1920년 명치정에 개설된 이후 객장은 물론 그 주위에 투기꾼들이 진을 쳤다. 어떤 자는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는가 하면 또 누구는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상황이 비일비재했다. 중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세계사적 격변기여서 전황이 그대로 주가에 반영됐다. 지금은 여의도로 옮겼지만 1970년대까지 명동은 모든 증권회사가 모인 한국경제의 중심지였다.
1953년 휴전을 전후해 명동은 다시 문인과 예술인의 터전이 됐다. 전쟁의 상처 속에서 실존주의철학과 니힐리즘을 논하고 예술과 인생을 토론하며 암울했던 시대의 정한을 풀었던 거리였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명동에 모여드는 이유가 있었다. 그곳은 방황하는 전후세대에게 일종의 해방구와 같았고 술집과 다방에서는 언제든지 외상을 줬기 때문이다.
1956년 봄, 노래 <세월이 가면>의 작사가 박인환이 죽기 일주일 전 동방사롱 앞 빈대떡집에서 가수 나애심에게 노래 한곡을 불러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날따라 노래 부를 기분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그러자 박인환은 즉석에서 뭔가 끼적였고 평소 샹송에 심취했던 시나리오 작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그 시에 악보를 붙였다. 그때 마침 술집에 들어온 임만섭이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불렀다. <세월이 가면>은 그렇게 탄생했다.
명동에는 이제 문화·예술인의 거취가 자취를 감췄다. 그것은 추억으로, 전설로만 전해진다. 그러나 명동은 여전히 유행과 멋을 낳는 거리이고 서울의 심장부다. 오늘도 쇼핑하는 내외국인들이며 그냥 청춘을 구가하는 젊은이들로 넘친다.
명동은 필자와도 인연이 깊은 곳이다. 1970년대 초 사회초년생일 때 필자가 다녔던 회사가 명동 바로 건너 소공동에 있었다. 점심때는 늘 길 건너 명동골목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때 순두부백반값이 100원이었다가 나중에 150원으로 올랐다. 냉면도 200원에서 나중에 250원으로 올랐다. 당시 월급은 4만5000원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여유가 있어서 식사가 끝나면 근처 백화점에서 LP 레코드판을 사기도 했다. 그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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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동상.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
◆남산성곽의 흔적을 찾다
조선신궁 건립으로 자취를 감춘 성곽은 2006년 5월에 추정선을 찾았다. 2년여가 걸린 이 작업은 1922년 제작된 경성부관내도를 기본도로 하고 그 밖에 서울시 도시계획도와 항공사진을 중첩시키는 방법으로 이뤄졌다. 경성부관내도를 이용한 것은 이 지도가 제작됐을 당시에는 조선신궁이 아직 들어서지 않아서 서울성곽이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남산 계단 길을 내려오면 남산공원 회현지구의 중앙광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는 성곽의 추정선을 따라가야 한다. 먼저 1968년 12월 설립됐다가 2006년 10월 철거된 옛 식물원 자리를 가로질러 간다. 친구나 연인과 함께 남산에 오를 때 들렀던 남산식물원은 1990년대만 하더라도 흔치 않았던 열대와 아열대식물을 구경할 수 있는 생태학습장 역할을 했다. 조선신궁 터였던 이 자리에 1956년 이승만의 동상을 세웠으나 1960년 4월26일 그가 하야한 후 분노한 시민들이 그 동상을 파괴했다.
성곽 추정선은 중앙광장의 분수대와 남산공원관리사업소 사이를 지나 안중근의사기념관 모퉁이에서 백범광장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 구간은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백범광장으로 내려오면 땅바닥에 그려놓은 성곽 추정선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광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맞은편 남서쪽 새로 복원된 성곽으로 이어진다. 왜 그 추정선을 따라 성곽을 복원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대로 복원한다면 백범광장을 토막 내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일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505호(2017년 9월13~1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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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자본시장과 기업을 취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