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⑬ 정조의 개혁 물거품 만든 '실수'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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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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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 /사진=뉴스1 오장환 기자 |
1800년 6월28일. 이날은 한반도 역사를 바꾼 날이지만 많은 사람들에겐 아직 낯설다. 세계 역사가 요동친 19세기가 막 시작된 이날 조선의 22대 왕이자 4색 당파를 물리친 탕평군주로 문예부흥을 이끈 정조가 갑작스럽게 훙서(薨逝)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다음달인 7월, 11살 순조는 이례적으로 서둘러 즉위했다. 어린 왕을 대신해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경주김씨가 수렴청정하면서 정조가 추진했던 정책을 모조리 부정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됐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기간인 ‘잃어버린 60년’이 시작됐다. 이후 1860년대까지 이어진 세도정치는 영조 52년과 정조 24년을 합해 76년 동안 이룩했던 개혁정책 대부분을 폐기하고야 말았다.
◆신해통공, 노비혁파, 문예부흥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25살(1776년)에 왕이 된 뒤 24년 동안 임금이면서 스승인 군사(君師)와 성인의 경지에 오른 ‘성군’이 되고자 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노론. 정조가 세손이던 시절 영조를 대신해 정사를 맡아 처리할 때 노론의 홍인한은 “동궁은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 없으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그리고 조정의 일을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三不必知)’론을 들이댈 정도로 기세등등했다.
홍국영 등의 도움으로 홍인한 등을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노론 주력은 벽파(僻派)로 남아 탕평책에 반대하며 정조를 괴롭혔다. 어쩔 수 없이 벽파의 거두인 심환지에 편지를 보내 구슬리는 ‘어찰(御札·임금편지)정치’를 펼쳐야 할 상황이었다.
정조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남인과 소론, 일부 노론으로 구성된 시파(時派)의 도움을 받아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대표적인 것이 규장각 설치와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이다. 그는 개유와(皆有窩)라는 도서실을 갖추고 청의 앞선 학문을 도입하려 노력했다. 노비가 도망갔을 때 뒤쫓아 잡는 추쇄제도를 없애는 등 노비제도 폐지를 추진하고 실력 있는 서얼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기용했다.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의 북학파를 등용, 이용후생에 적극 나섰다.
이는 1791년의 획기적인 신해통공으로 이어졌다. 신해통공은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독점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한 것으로 상공업발전의 기반이 됐다. 상업이 발전함에 따라 금난전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정조는 남인의 총수격인 좌의정 채제공의 도움을 받아 통공정책을 시행했다. 1794년에는 노론 기득권층이 금난전권 회복을 주장했으나 통공정책을 재확인(갑인통공)했다. 신해통공 이후 서울은 물론 평양, 개성 등 상업도시가 발전했고 상업의 발전은 수공업 발전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서학에 대해서도 관용정책을 폈다.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정학(正學)에 힘쓰면 서학은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라 판단, 서학 금지를 요청하는 상소를 물리치며 정약용 등 남인 세력을 감싸 안았다. 신분제약이 느슨해지고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문화도 꽃폈다. 진경산수라는 국화풍(國畵風)과 동국진체라는 국서풍(國書風)이 자리 잡으며 조선문화의 독자의식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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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 /사진=뉴스1 임준현 기자 |
◆정조의 실수… 후계구도 미비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한 정조는 27명의 조선 왕 가운데 유일하게 문집을 남겼다. 세손 시절부터 왕으로 재위하는 기간 동안 직접 쓴 여러 형식의 글을 모아서 만든 '홍재전서'(弘齋全書)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무결점을 추구했던 정조도 치명적 약점을 남겼다. 도덕군자를 추구했던 정조는 왕위를 이을 왕자 출산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첫 왕자인 문효세자가 태어난 것이1782년이니 그가 31세 때다. 늦게 왕자를 본 기쁨으로 3살이 되자 세자로 책봉했지만 불행히도 5살 때 요절했다. 그리고 순조가 태어난 것은 정조가 39세였던 1790년. 10년 뒤 정조는 그가 벌여놓은 개혁과제들을 마무리 짓지 못한 채 갑자기 훙서했고 11살에 왕위에 오른 순조는 아버지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정순왕후의 ‘정조 지우기’를 지켜봐야 했다.
다음으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시스템을 무너뜨린 것이다. 정조는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왕권강화를 추진했다. 반대파인 노론 벽파를 ‘어찰정치’로 제어하고 지지세력인 시파는 군사로서 이끌면서 국왕에 간쟁하는 대간 역할을 무력화했다. 여기에는 당파싸움의 근원이 대간에서 비롯됐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 탕평책도 작용했다. 하지만 정조라는 카리스마 군주가 사라지고 순조가 즉위하자 그 부작용은 즉각 나타났다. 대간 기능이 약화된 상황에서 안동김씨 일족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는 데도 ‘목숨걸고’ 이를 제지할 대간이 없었던 것이다.
셋째로 권한 위임에 인색해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만성피로에 시달렸고 결국 ‘과로사’했다는 점이다. 정조는 소수파인 채제공을 중용함으로써 기득권 다수파인 벽파의 반대에 부딪쳤다. 채제공은 1789년 좌의정이 된 뒤 3년 동안 영의정과 우의정이 없는 독상(獨相)을 지냈다. 이는 과거 100년 동안 없었던 일. 물론 그 기간에 노비추쇄금지와 신해통공 등 굵직한 개혁정책을 시행했지만 그가 1798년 서거한 뒤 정조는 믿을 만한 신하가 없어 더 과로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독서와 정무처리로 매일 잠자는 시간이 2시간 안팎에 불과했고 시력이 나빠져 안경을 써야 글을 볼 정도였다. 아직도 가시지 않는 ‘독살설’의 빌미가 된 심각한 종기도 과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패치워크로 실패한 정조
정조는 청 건륭제 치세의 앞선 문물을 적극 도입하는 패치워크를 통해 신분해방과 신해통공 등 개혁에 성공했다. 하지만 주희 성리학 테두리에 갇혀 급변하는 18세기 말의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매년 연행사가 연경에 다녀왔지만 그 너머에 있는 서양, 산업혁명을 이루고 빠르게 동양을 잠식해오는 세력을 파악하지 못했다.
정조의 이런 반패치워크는 ‘부자가 망해도 3대는 간다’는 속담과 달리 ‘꽃이 피기는 어려워도 지기는 잠깐’이라는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제2법칙)을 반증하는 듯했다. 순조 이후 철종까지 60여년을 잃어버려 근대화에 뒤떨어지는 요인이 됐다.
필부의 잘못은 개인과 가정의 고생으로 끝날 수 있다. 하지만 국왕이나 대통령, 최고경영자의 실수는 나라와 기업의 존망을 좌우한다. 조선을 부흥시키기 위해 24년 동안 밤잠 설쳤던 정조. 하늘에서 그의 노력이 물거품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어떤 아픔을 느꼈을까. 지금도 서늘해지는 질문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60호(2018년 10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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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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