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체성이 모호한 어느 대기업에서 최근 ‘개화기’를 주제로 마케팅을 벌여 논란이 됐다. 개화기는 사전적 의미로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가 서양문물의 영향을 받아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사회로 개혁을 한 시기다.


물론 이것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사전적 의미’에 해당한다. 1945년 일제 강점기를 벗어나기 전까지 우리나라는 개화기라는 미명 아래 강제적인 통치를 받았다. 개화기라는 용어도 전적으로 일본 입장에서 만들어진 단어인 만큼 사용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여기서 의문점 한가지가 떠오른다. 신문물을 받아들인 ‘모던보이’나 ‘신여성’이 등장하는 동시대 배경의 작품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표적인 작품으로 tvN에서 방영된 <미스터 션샤인>이 있다. 극중 시대상을 보면 경성(지금의 서울)을 배경으로 상투 대신 단정하게 머리를 자른 남성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김희성(변요한 분)은 양반가 자제이자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대표 모던보이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개화기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해당 시기를 표현한 모든 작품이 논란이 된다는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미스터 션샤인>을 비롯한 대부분의 드라마와 영화는 화려해 보이는 시대 속 아픈 역사를 재조명한다. 각자의 위치에서 독립을 위해 싸운 선조들의 얼을 표현하고 그 정신을 다시 새기자는 교훈을 전한다. 일회성 마케팅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달간 놀이공원에 ‘개화기’ 의상을 입고 오면 할인을 해주겠다는 대기업의 선심성 프로모션을 곱게 보기 어려운 이유다. 꽃이 피는 시기라는 뜻의 ‘개화기’라고 해명했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외국기업임에도 국내 문화재 환수를 위해 매년 수익 일부를 투자하는 라이엇게임즈의 행보에 비춰보면 왜 지탄받는지 극명히 드러난다.

라이엇게임즈는 ‘리그 오브 레전드’로 국내 온라인게임시장을 평정한 외국기업이다. 게임업계에서는 다년간 PC방 점유율 1위를 유지하며 독보적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특히 해외지사격인 한국에서 사업을 영위하면서 2012년 문화재청과 문화재 지킴이 협약을 체결한 후 약 8년간 누적 50억원 이상을 기부했다.


이를 통해 2014년 미국에서 ‘석가삼존도’를 환수했고 지난해 프랑스에 있던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과 올해 독일 경매에 출품된 ‘척암선생문집 책판’에 이르기까지 3개의 문화재를 들여올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는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이자 지울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이다. 수많은 취재진에 둘러싸여 어눌한 한국말로 국가 정체성을 밝히던 그때를 기억한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순국지사들의 피땀도 두고두고 새겨둬야 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9호(2019년 4월23~2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